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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바이블/말씀

2024.2.25.일 (주일예배) 더 너그러운 마음

by diane +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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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더 너그러운 마음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폭행하는데 이제 바울은 밤에 황급히 데살로니가를 피해서 이제 다른 곳 이 근처에 100km 떨어진 베뢰아로 도피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문으로 인해서 아직 낫지않았습니다. 그러면 좀 쉬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되는데 그는 곧장 그 다음날 유대인의 회당이 들어가서 전도를 시작합니다. 전 도시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지난번 데살로니가 도시보다 뭔가 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베뢰아 도시의 분위기는 부드러운 도시, 도시마다 또 분위기가 다르죠.
특징이?
첫째, 분위기가 너그러운 마음이었다.
너그러운 마음, 개혁 성경에는 신사적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신사적인 부드러운 너그러운 마음, 원어로 보면 유게네스라 하는데 유는 좋다 게네스는 유전자 아니면 남녀 성 이런 의미를 갖고 있죠. 그래서 좋은 자손이다 좋은 혈통이다 고귀한 혈통 가문이다 마음이 고상하다 태생적으로 좋은 태생적으로 착한 이런 도시 분위기가 그랬다는 개혁 성경에는 신사적이다 공동번역을 보면 마음이 탁 트인 사람들이다. 표준새번역을 보면 더 고상한 사람들이다. 루터 번역을 보면 더 고결하다. 어떤 마음이 고귀한 마음일까?
조금 전에 데살로니가 도시는 탐욕적이고 공격적이고 그런 분위기 근데 베뢰아는 너그러운 분위기. 대인 관계에 있어서 너그러움은 관대하다. 타인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 경청한다. 타인의 생각을 수용하고 이런 고상한 성품을 의미하는 거에요.

오늘 우리가 우리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나와 다른 친구 이게 용납이 안되는 거에요. 내 편과 적. 이런 사회에 우리가 좀 필요한 우리도시 분위기 국가가의 분위기가 그 베뢰아 처럼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아닐까요. 관대하고 너그럽지 않으면 사실은 손해를 보는,  자꾸 원수를 만들어내며 네트워크가 좁아지잖아요. 내가 설 내 땅이 좁아지는 거에요.  친구들을 만드는 너그러운 성품이 아닐까요.

베뢰아 두번째 특징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간절한 마음 영어로 온마음 이런 의미를 갖고 있어요. 위드 온 마이 하트 전심으로, 관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 사람들 속에 전심으로 무언가를 하는 열정이 또 있다는 거에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야 이런게 아니라. 진리를 향한 큰 열정 또한 있다는 거에요. 큰 열망을 가졌다. 라틴어를 보면 그 느낌을 이 사람들이 매일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말씀을 받아들였다. 게걸스러운게 뭔가요? 배고픈 사람이  굶는 사람이 잔칫집에 가서 그냥 잔뜩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는고 먹는 거, 진리를 향해서 말씀을 향해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에요.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 바탕이 부드러운데다가 고귀한 열정까지 있었다. 너무 멋진 사람인것 같아요.

세 번째 특징은 날마다 상고했다. 상고한다는건 조사하고 연구한다는 거에요. 이사야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예언 정말로 예수님의 기적이 다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복음서를 막 읽어보고 그러면서 정말로 이루어졌네 이렇게 자기가 확인하는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그런가 봐요 아니고 라틴어로 스쿠리탄트 라는 스크루트는  조사하고 면밀히 검사하고 성경을 그렇게 했다는 거에요. 지성적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죠.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좋은게 좋은거야 받아들이지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능동적으로 차기 주도적 자세로 성경을 이해했다는 거에요. 그랬더니 복음을 믿는 사람이 많아지다더라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게 믿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만으로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더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말씀을 이렇게 가까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되죠? 열심히 배워야죠. 그런데 열심히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뭡니까? 가르치는거죠.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는 리더가 되시겠다. 한번 두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순간 자기 신앙이 자랑이 것일꺼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 중심의 신앙을 살아가야 됩니다. 이 말씀을 탐구하고 깨닫는 진리가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이 기쁨 즐거움 속에 살아가고 큰 힘을 주고 에너지를 주는지 영적인 기쁨과 영적인 에너지 이걸 말씀으로부터 받아 살아갈 때 우리가 정말 의미 있는 사람을 살아갈 수가 있는 거죠.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고 우리 삶의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른 여러 기관에 책임을 맡을 때도 있습니다. 회의도 많고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일 특별히 대사회적인 액션을 취하고 메서지를 전하려면 경솔하게 할수가 없어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래도 이런 행정적인 일은 지혜를 내고 시간을 절약하면 이 시간에 비해서 많은 일들이 드러납니다. 얼마든지 많은 일들을 감당할수가 있어요. 근데 아무리 활동이 바빠도 말씀 연구하는 일은 바쁘지가 않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어요. 말씀 연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더 앞서는 거는 없습니다. 성경 연구는 지름길도 없고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도 없습니다.
성경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다리고 그게 성경 연구에요. 내게 2시간 있으면 2시간 묵상하는거고 10시간 있으면 10시간 묵상하는 거고 잠을 잘 때도 통잠으로 새벽까지 계속 자면 자는거고 하나님이 두 시간마다 깨워 주시면 또 묵상 노트를 쓰고 이거에요.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조사하고 하면 할 수 있도록 신비롭고 은혜롭고 기쁘고 감사가 넘치고 충만하고 이것을 우리가 깨달았을 수 있어요. 세상 일을 하다 보면 지치고 피곤하고 황폐해지고 우리 영생을 계속 소비해 나가고 소비하는 시간 사용하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말씀과 성령 안에 있을 때는 이것이 소비의 시간이 아니라 생산의 시간이라면 창조의 시간이고 생명의 시간이 되는거에요. 내 삶이 풍부해지고 내가 살아나는 생명의 시간을 경험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언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향해 열정적인 구도적인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세상에서 살다가 삶에 지칠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옵니다. 뭐 때문에? 삶에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어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참된 진리를 향해 교회를 찾아옵니다. 굉장히 진지한 태도로 교회를 찾아옵니다. 진리를 향해 찾아 오는 이 구조자들 세상 사람들을 이들의 열정을 우리가 먼저 있는 사람들이 실망을 시키면 안됩니다. 우리는 새가족 사역 바나바 사역 양육 사역 또 영적훈련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말씀안에서  진지하게 감당해야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진리를 따라가는 구도자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도자가 되어야 됩니다. 또한 구도자들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찾아와서 진리를 요구할때 우리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가 있어야 되는거죠. 베뢰아는 이런 준비가 된 그런 교회의 그런 도시였어요. 베뢰아에서 보니까 온도시 사람들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이 사람들이 복음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진리에 대한 수용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주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근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든 있어요 사실. 베뢰아만 있는 게 아니라 사도바울이 이런 사람들이 어디 있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미리 약속한 것 도 아닌데 사도바울이 가는 곳에는 항상 주린 영혼들이 있고 복음을 받아들였어요. 사도바울이 긴급하게 이동을 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거에요.

오늘 만난 베뢰아라는 도시 얼마나 이 분위기가 좋냐 우리는 문화 민족이야 우리가 원하는 최고로 발전된 문화야 우리는 자기 언어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그런 나라들도 있잖아요.

근데 그 분위기가 지성적이고 신사적이고 관용적이고 수용적이고 공감적인 분위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책 오를 때 제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아니 밥을 넣었는데 한 20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아버지의 아들 다들 한 반드시 카는데 루머가 굵기 넘치는 거예요 야 인식을 못해 너무 부러웠어

이런 베뢰아의 분위기에서 영적이고 또 지적으로 자극을 받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가 존중받는 기분이 들때 매일 발전하는 기분을 들고 더 거룩해지는 기분이 들고 지식이 쌓이고 더 지성적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에 참여하는 분위기 얼마나 좋습니까. 성령 충만한 분위기가 좋지요. 이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부모가 거실에서 자기가 책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아이가 거실에서 독서를 하는거에요. 여러분은 우리 사회에 파송 받은 선교사입니다. 이런 영적인 분위기를 여러분이 속한 그 단체에서 만들어야 돼요. 각각 다른 사무실에 여러분들이 다 출근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를 유치원부터 청년 부까지 보니까 또 교사들이 있죠 그러면 각각 이 교사들이 몇 학급을 들어가느냐 여기서
우리가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중요한 도시 앞서가는 도시 근데 여기에 우리가 2천개의 그룹에 여러분이 리더가 돼서 학급의 사무실의 분위기를 바꿔가고 그렇다면 이 도시에 혁명이 일어날거에요.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 도시 분위기를 복음적이고 아름답게 바꿔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언합니다. 이런 분위기의 주인공이 되고 이런 분위기 메이커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예비하신 예비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그냥이 아니라 먼저 믿은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겁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인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죠. 근데 교회를 나와서 이제 신앙생활 해갑니다. 처음에 어색해서 눈치를 딱 보고 있는데 세달지나면 모태신앙이에요? 물어볼 정도로 적응을 잘하는 분들이있어요. 그러면 믿음이 커갑니다. 근데 이런 분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전도자가 내가 전도를 안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저렇게 잘 믿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시아선교를 막으시고 유럽 선교에 문을 열어서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고 데살로니가에 와서 꽤 많은 열매를 맺고 또 도망쳐서 베뢰아에 왔는데 더 큰 열매를 거둡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요.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이런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빨아들어서 믿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영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진 거에요.
우리 사회도 복음을 믿는 분위기 그렇게 변화시키는 여러분되시길 축언합니다.

귀부인들이 많이 믿었다. 이것이 도시마다 분위기가 다른거에요. 데살로니가 귀부인은 높은 계급의 귀부인들 베뢰아에 있는 귀부인은 교양 있는 권력자의 부인이라고 진정 교향이 있고 품위가 있는 고상한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었다.  
도시의 일반인들에게 전도가 많이 되었고 귀족의 상류층에게도 적지 않은 상당한 숫자가 믿게 되었어요. 우리의 전도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 예정한 사람들을 만나시는 거에요.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다 예정을 해놨는데 우리가 안가서 안전하면 하나님의 예정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되 베뢰아 사람들처럼 어떻게 관대한 마음을 너그러운 마음을 유게네스로 좋은 성품으로 타고난 천성으로 착한 천성으로 그렇게 전해야 돼요.

아니 근데 내 착한 천정을 내가 마음대로 만들 수 있나? 성령은 곧 거듭나면 착한 천성으로 거듭나는거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인격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에요. 이렇게 복음 전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언합니다.

두 가지 신앙 스타일이 있어요. 세상 죄를 많이 짓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 또 인간적으로 그냥 온화하게 살다가 예수 믿고 바꿔가는 사람, 물론 둘 다 죄인이죠. 인간적으로 볼 때 삶의 스타일이 조금은 다르다는거죠. 바울은 전자 앞에 험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하고 그런데 두 번째 스타일은 베뢰아 스타일 바울은 핍박자고 전 기독교인을  공포에 떨게 하고 핍박하고 처형하고 스데반을 죽게하고 잔인했어요. 근데 회개하고 자기가 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되돌려받습니다. 가는 곳 마다 박해를 했더니 이제는 가는 곳마다 자기가 핍박을 받아요. 자기가 주었던 핍박을 그대로 자기가 핍박을 받아요.
베뢰아 사람들 착한 천사로 유전자형으로 착해서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삶을 살이갈까요? 여러분은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각자 자신의 길이 있어요. 다만 우리가 이 사회에 더 전도하고 이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더 만들기 위해서 그래도 우리가 생각할 때 아름다운 모습이 있어요. 바퀴벌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궁창에서 살아가죠. 시궁창은 바퀴벌레가 살기에는 천국 같은 곳이에요. 언제든지 먹을것이 있고 깨끗한 주방을 방문해봤더니 시궁창과는 수준이 다른거에요. 우리 여기서 살자. 친구들에게도 좋은 곳이 있어 거기가서 살자. 아무도 따라가지 않아요. 죄라는 시궁창에서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되는 거에요. 이것이 먼저 믿은자의 소명인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나도 그랬지 나도 나쁜놈 죄인 입장이였지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거에요.

플라토닉도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런 비유를 듭니다. 동굴안메 죄수들이 갇혀있어요. 근데 죄수들은 목도 못들고 꽁꽁 묶여 꼼짝 못하고 앞벽만 보고 있어요. 벽면에는 그림자가 보입니다. 죄수들의 뒷면에는 이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림자놀이를 하는데 그 그림자놀이가 이 벽에 보이는 거에요.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 밖에 볼 수가 없어요. 태어나면서부터 꽁꽁 묶여 갖고 그림자만 평생 보고 있는거에요. 그게 진리로 생각을 하는거에요. 근데 사실은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근데 한 죄수가 사슬을 풀고 밖에 나왔어요. 보니까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자기는 벽에 그림자가 실체인줄 알았는데 밖에 찬란한 태양이 있고 바람이 불고  아름다운 새가 날라다니고 열매가 맺히고 너무 아름다운 거에요. 동굴안으로 들어가서 갇혀 있는 죄인들에게 바깥세상은 진짜 천국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지를 않아요. 태어나서부터 그림자만 보아서.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미친거라고. 동굴의 비유입니다.

물론 플라토닉은 다른 의도로 얘기했죠. 철학을 설명하려고 이데아의 세계는 이런거야.
우리 신학에서는 이 비유를 조금 다르게,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서 참된 진리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있어요. 우리가 보는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한 허상이에요. 동굴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동굴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 같아요. 그리고 동굴 밖의 세계가 참된 진리의 세계입니다.누구든  참된 세계를 보면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봐야 해요 쇠사슬을 끊어버려야 돼요. 그런데 이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밖의 실체를 보고 다시 돌아온 이 죄수가 누군가요? 선지자 전도자 먼저 믿은자에요. 우리가 먼저 믿어서 예정된 사람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원하기로 예정된 그 사람에게 우리는 당연히 다가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줄로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도바울이 베뢰아까지 가서 전한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포악한 데살로니가가 다른 도시까지 원정 시위를 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은 바울을 피신시키고 아테네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쓰는 방법이에요.

우리가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두려움은 그 두려움 때문에 복음이 더 잘 전도되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이 축복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박해에서 스데반을 죽이고 엄청난 폭동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전세계로 다 흩어졌어요. 이게 복음이 전세계로 퍼졌어요. 그럼 또 저항이 핍박이 생겨 또 이동을 해야죠. 또 퍼져요. 이것이 성령의 뜻입니다. 내 마음이 아니고 성령의 뜻으로 성령이 내 인생에 주도권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전도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상한 몸으로 이끌고도 헌신처럼 찢어진 그 육체를 이끌고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달자로 전념을 했습니다.
헬라의 우상 숭배 속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생명길을 구원의 길을 걸어가고 터닝포인트를 그들에게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사회가 터닝포인트가 필요하지 않아요? 전환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사회가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분위기가 바뀌어야 되지 않겠어요? 영적인 분위기 사랑의 분위기 천국을 향한 분위기로 말씀과 성령안에서 역사에 쓰임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사랑의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복음을 이 사회에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널리 퍼지는 사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대에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들 되게 하시고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전도자들이 다 되게 하시고 이 땅의 모든 분위기와 이 땅의 모든 역사를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향하여 가게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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