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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바이블/말씀

2024.4.4.목 (주의말씀) 일천번의 번제와 같은 기도, 가장 좋은 낚시 법, 돌을 옮겨 놓으라

by diane + 2024.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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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1장
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놓으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이와 같은 때엔 난 노래하네 사랑을 노래하네 주께 이와같은때엔 손 높이드네 손 높이드네 주님께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오 주님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고단한 어제가 지나고 오늘 눈뜨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일들로 힘들 때도 있지만 예상할 수 없는 기쁨 또한 많았기에 감사합니다. 어떤 날이든 불평하는 마음 없이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기에 새롭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없다면 이 하루가 얼마나 힘들지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간절한 하루입니다. 주님의 붙잡으시는 손이 오늘도 필요합니다. 주님과 손잡고 가는 소풍 길 같은 하루 되게 하소서. 인생은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사는 것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하루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편 139장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을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책이로다


고전13:3
고린도전서 13장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마음을 다해 남은 돕는 사람들은 작은 손길과 바라보는 시선 마저도 다릅니다. 오늘도 주님의 크신 사랑을 먼저 입어 그 마음을 품고 사랑의 눈과 손길로 먼저 다가갈 수 있는 하루 맞이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의 눈과 손길


주의 사랑 비췰때
주의 사랑 비췰때 기쁨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주의 사랑 비췰때 기쁨오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화평함과 기쁨주네 그 큰 사랑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의 주 하나님 오늘 그 창조의 주 하나님의 그 귀한 능력과 사랑을 힘입어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모를 지라도 길을 예비하고 계시고 우리는 모를 지라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놀라우신 일을 행하시고 계시겠사오니 오늘도 한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신뢰하게하사 찬양하게하사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주실것을 믿습니다. 잊새벽부터 우리에게 그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일천번의 번제와 같은 기도
열상3:4~15
열왕기상 3장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15.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시작이 반이다. 시작하기 어렵지만 일단 시작해놓으면 반은 성공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작을 잘해야 그다음 일들이 수월해지는 법입니다. 무슨일을 하든지 시작을 잘 살펴야 되고 기초를 잘못 닦아 놓으면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놓아도 이내 금이 가고 붕괴의 위험을 겪을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어요. 나라와 백성을 통치할 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라는 겁니다. 자기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라와 백성이 평화를 누릴 수도 있구요 어려움도 겪을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죠. 바로 이 시작의 시기에 솔로몬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다윗이 누가 봐도 성군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에서 겪은 어려운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걸 어려서부터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솔로몬이 어떻게 나라를 통치해 나가야 될지 무척 고민이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기도하기로 작정하죠. 그것도 일천번제를 드리는 쉽지않은 기도를 드렸던것입니다. 희생 제물을 재단 위에서 불사르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거나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기로 원할 때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이죠. 솔로몬은 백성들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시작하기를 원했는 겁니다. 그래서 신하들과 지도자들을 모두 이끌고 기원 상단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자하는 신앙고백을 담아 일천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무슨일에든지 시작에는 충분한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기도가 없이 시작하는 것은 마치 배낭을 매지 않고 산을 오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얘기했지 않습니까. 충분한 기도가 있다면 시작이 반이 아니라 시작이 성공이라는 사실을 꼭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에 실패가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시작이 성공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겁니다.

오늘 솔로몬이 기도로 통치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기도를 시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천번제와 같은 기도는 솔로몬의 기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기도는 바로 우리 기도요 이 시간 나의 기도가 될 수 있어야 된다라고 말씀이죠.

그렇다면 솔루몬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첫째 정성을 다 쏟는 기도였습니다.
일천번의 절을 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데 일천번의 제사를 드린다는것은 쉽게 상상할수 없을만큼 엄청난 일이었다는 겁니다. 학자들은 힘을 다해 번제를 드린다고 해도 최소한 7~8일은 걸렸을거라 짐작합니다. 그러니 그 정성이 어느정도 였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정성을 들이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특히 기도에 정성을 들인 일은 실패하는 법이 없죠. 인간적인 영 성은 정성으로 끝나버릴 때가 적지 않지만 기도에 정성을 들이면 무엇이든지 달라지게 되어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정성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에 정성을 들이면 사람이 달라지죠. 기도에 정성을 담으면 사업이 든든해질 수 있습니다. 기도에 정성을 들이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벽들이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리라 믿습니다. 사람에게만 정성을 들여도 어렵던 일들이 해결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 정성을 들인다면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느냐라고 하는 것이죠.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는 정성으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꿈이 나타나셔서 솔로몬을 만나 주셨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소중하다고 여겨집니다.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든지 기도 중에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받든지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가 온전한 기도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물으셨어요.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말씀은 무엇을 구하든지 들어 주시겠다라고하는 약속의 물음입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들이는 정성만큼만 하나님께 정성을 들이면 못 이룰 것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을 가끔 해보게 됩니다. 자식에게 드린 정성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정성이 커야 되는 것은 당연하겠죠. 근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그것이 문제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사랑하는 이삭을 드린 아브라함 처럼 되려면 우리는 아직도 멀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자식에게 들이는 정성만큼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일천번제의 정성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솔로몬은 올바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가 위대한 것은 일천번이라고 하는 엄청난 횟수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을 줄고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솔로몬은 다윗왕의 뒤를 이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한 후에 말합니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될 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기록입니다.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우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아야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무엇을 구해도 하나님 다 들으시죠. 네 기도제목이 틀렸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제목은 달라야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할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가 그렇지않은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종 축복을 덤으로 받게 되었죠. 구하지 않았던 부와 영광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다 솔루먼의 일천번제 기도가 정성을 다한 기도였고 하나님 마음에 와 닿는 올바른 기도의 제목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겁니다.

늘 기도하기에 힘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될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비록 일천번의 번제는 드릴수 없겠지만 일천번의 번제와 같은 정성과 올바른 기도의 제목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올바른 기도 제목으로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축복까지 응답 받으며 살아갈수있는 믿음의 사람 복있는 사람이 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해 같이 빛난다 오늘도 내일도 주 안에 살리라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


이사야14:24~16:5

이사야 14장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26.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주위를 보면 사람들이 참 갖가집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앞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음악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좋고 하나님은 정말 다양하게 사람을 만드셨고 또 다양하게 사용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문제는 한두 가지만 잘하지 나머지들의 모습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가 있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정상적인 것보다도 더 못한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서로의 부족을 보고 탓하지 말고 서로의 장점을 보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10가지 단점이 있어도 한 가지 장점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하죠. 오늘도 서로 격려하며 주어진 장점을 찾아 최고의 것을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도미노사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날 붙들어주시고 내 마음에 새 힘을 주사 늘 기쁘게 하옵소서


가장 좋은 낚시 법
누가9:6
누가복음 9장
6.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남들보다 유달리 물고기를 잘 잡는 어부가 있었습니다. 다른 어부들이 빈 그물로 돌아올 때도 이 어부만큼은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 어부를 낚시의 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부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며 여기저기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부는 고기를 낚을 시간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아예 가르침을 정립해 학문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듣고 보니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어부를 낚시하기라는 학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학문만 배우면 누구나 다른 어부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점점 많아져 오늘은 낚시 대학이 생겼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직접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기보다는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편하게 돈을 벌기 원했습니다. 어부 역시 매우 오랜 기간 바다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마치고 은퇴한 어부는 마침내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기를 잡은 지 너무 오래 되어 모든 노하우를 잊고 말았습니다. 머리로만 낚시를 기억했던 어부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블러 신학교에 성서 성교학 교수인 찰스 벤엥겔 박사가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예화입니다. 가장 좋은 선교 이론은 밖에 나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지 말고 교회 안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밖에서 곧 실천하는 선교의 달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복되고 형통합니다 아멘.
주님 머리나 이룸이나 관념이 아니라 생활과 행동으로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최소 세 명의 전도 대상자를 정하고 기도로 준비한 후 복음을 전하십시오.


예수 나를 위하여


내 주를 가까이


돌을 옮겨 놓으라
요한11:39~44
요한복음 11장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아무래도 암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암은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미완의 질병이고 우리 모두가 불안해하는 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암보다 훨씬 더 무서운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병이 있다는 것 아십니까? 암이 육체의 병이라고 하면 이 병은 마음과 생각의 병입니다. 병의 이름은 절망입니다.

암은 스스로 고치려고 몸무림치는 병이지만 절망은 그 스스로가 무너지려고 발버등 치는 병이기도 합니다. 온통 우리 사회는 절망이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이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고 자아의 죽음을 말하는 겅이죠.

절망은 나와 나를 분열시키는 겁니다. 나는 내일을 꿈꿔야 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되고 나는 오늘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내가 있는데  이 내가 자꾸 절망 포기와 낙심과 끝장으로 서로 나누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 속에서 자기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그래서 절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나 혼자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널부러진다 이런 생각만 가질 수 있는데 절망은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는 아주 못된 병입니다. 사람이 절망에 묶이게 되면 스스로 열등감에 붙들리게 되지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라는 존재는 이렇지만 나 같은 게 뭘 한다고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고 열등의식에 포로가 되어서 자기를 학대합니다. 말로 확대하고 생각으로 확대하고 행동으로 자기를 학대하죠. 이 자기 학대가 좀 더 극으로 치달으면 생각하지도 않아야 될 그런 생명을 죽이는 그 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이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고 절망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도 분노와 미움과 증오를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내면세계를 파괴시켜서 결국은 우리의 이 육신까지 파멸에 이르게만들어요. 그니까 이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절망은 개인과 사회 공동체가 심각하게 경계해야 될 질병입니다.

이 절망이 왜 발생하는가?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과 부딪치면서 어떤 여러 가지 경제활동과 부딪치면서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현실과 부딪치면서 절망은 발생하게 되어 집니다.
이 절망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가?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에게도 절망은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도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가정, 나사로가 죽음을 만나서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마르다가 어떤 사람이냐?
요한복음 11장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게 굉장히 고상하고 우회적인 표현이지만  마르다가 절망하고 있는 원망의 소리이지요. 근데 마르다는
누가복음 10장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와 이 가정의 만남의 시작입니다. 예수를 그 가정에 초청한 사람이에요. 복음을 들여온 사람이에요. 복음의 전달자에요 그 가정에 믿음의 호주가 마르다, 굉장히 열정있는 여자였어요. 그 당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다는 것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결단력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사람, 영적인 것에 굉장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현실과 부딪쳐서 그의 삶의 현장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이현실 문제와 부딪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 자매 마리아도
요한복음 11장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요한복음 11장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마리아는 헌신적인 여인이었어요. 신앙심이 독독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지않고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으면 전폭적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던 그런 성도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굉장히 관심이 있던 사람입니다. 적당히 주의해야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아주 크게 귀기울여 말씀을 청종했던 여자에요. 성공 공부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고자 몸부림쳤던 여자.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았던 여자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도 지금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심지어 이 병으로 인해 나사로가 죽습니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조차도 주님은 절망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내가 부활이다 내가 생명이다 그러니 죽은 너도 살아날 수 있어 절망하지마 주님이 절망을 경계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은 죽은자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 앞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절망에 묶일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돌은 무슨 돌입니까? 무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무덤 문이에요. 그러니까 이 돌문은 절망에 최종적 선언이 돌문입니다. 거기 시신을 넣고 돌을 굴려 무덤을 입구를 막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게 절망의 최종적 선언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돌문입니다.

돌문을 열어라라고 말씀을 하시죠. 예수님의 의미는 절망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절망은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지금 말씀을 계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그럼 신앙으로 산다는 건 뭐예요? 신앙으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온통 절망이 뒤덮은 이 세상속에서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답을 붙들고 절망을 붙들고 사는 삶이 아니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희망 속에서 산다라고 하는것이 신앙으로 산다는 믜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예요. 믿음으로 산다 나는 믿음으로 살아라고 하는 말은 나는 절망과 절교해서. 절망과 나는 절교했다. 나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의미가 바로 기독교 소개 담겨진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절망은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해결하고 극복 해야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절망을 경계시키고 절망을 금지하라고 말씀하셨던 이 주님은 그럼 이 절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나? 주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첫째로 주님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십니다.
그는 나사롭니다. 죽어버린 나사로 절망의 내용 그것이 바로 그 나사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 말은 주님이 지금 절망과 대면하자. 절망과 맞서자.  

그런데 우리가 이 사건을 이미 아는 대로 죽은 나사로 시신은 을 무덤 속에 두었다. 무덤 속에 두었다는 말은 스스로 절망의 결론을 내리고 무덤 속에 감추어 놓았다. 주님은 그를 찾습니다.

절망은 피하는 것이 아니고 절망은 숨기는 것이 아니고 절망은 외면 하는 것이 아니고 절망은 마주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가르쳐요. 피하면 답이 없고 숨기는 답이 없어요. 외면하면 답이 없지만 절망은 대면하면 해결의 답이 있습니다.

이 절망의 내용 죽은 시체 나사로를 누가 무덤으로 옮겼습니까?
마르다 와 마리아 그들 스스로 무덤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답이 없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라고 선언 한 것이지요.

이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을 만나 대처하는 맞나 보편적 태도입니다. 절망은 스스로 숨습니다. 그래서 절망은 절망 당한자에 의해 외면당합니다. 우리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도 하기 싫어 이게 너무 힘들어 너무 두려워 너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미친것 같아 무덤 속에 넣어 버리자 그리고 생각하지 말자 외면해 버리자 덮어버리자.

그런다고 절망이란 것이 덮혀지지 않습니다 무언가 얹혀진 것처럼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절망이 힘들고 무서운 거죠. 외면하려해도 잊으려해도 덮어놓았는데도 덮여 지지 않으니까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죠. 죽어야 잊혀지는가보다 내가 죽어 버려야 이게 덮여 지려나보다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죠.

절망은 그 절망을 드러내놓고 다시 절망과 마주하여 대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치료의 출발입니다.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해결이 시작 됩니다. 근데 우리는 나의 절망의 상황을 부끄러워할 때가 참 많죠. 이 절망을 드러내기가 겁이 나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돌문으로 꼼꼼 막아놓고 싶어하는 거죠.

사실 대면해서 보면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내가 살고 있기에 내가 현실 세계 있길래 내가 이현실 세계 속에서 삶을 엮어가기에 그 한 부분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렇게 내가 못 만날 만큼 두렵거나 그렇게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나를 그렇게 하는것은 사실 아니에요.

살면서 문제 없는 인생이 어디있나요. 가만히 보면 모두의 일상이 절망을 끌어안고 삽니다. 절망의 모양과 크기와 색깔이 다를 뿐이지 절망을 마주하지 않고 살아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절망을 마주해보면 그냥 모두의 일상이고 내 삶의 한 부분일 뿐이에요 근데 그 절망을 피하면 답이 없고 숨기면 답이 없지만 그가 어디에 있느냐 그를 찾아내 만나면 답이 보입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문제와 대면하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굴 속에 집어넣고 굴문을 돌로 막아버리면 기도도 포기해버리고 예수 아닌 척 외면해버리면 잊어버리려고 하면 기도하지 않죠. 그럼 이 답이 없는 거죠. 대면하면 도움을 얻게 되고 대면하면 해결 할 용기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절망케 한 그 절망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을 그렇게 힘들게 미칠 것처럼 만드는 그 절망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다시 찾으십시오. 그리고 만나 십시오. 대면 하십시오. 그것이 치료에 시작입니다. 대면하는 그 순간 새로운 시간이 우리 앞에 시작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그를 어디 두었느냐? 절망과의 대면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둘째로 주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 이 말은 해결하자라는 이야기죠. 찾았으니 돌을 옮겨 놓아라. 해결을 시도하자는 겁니다. 이 해결을 위해 도전하자라는 이야기죠.

돌로 막았다는 말은 숨겼다는 이야기죠. 돌로 막았다는 말은 포기했다는 이야기죠. 돌은 희망을 차단시켜버린 겁니다. 돌은 오늘과 내일 미래를 차단시킨 겁니다. 그 돌문은 가능성을 차단한 겁니다. 희망을 포기시킨것이 이 돌문입니다. 돌은 절망의 최종적 선언이죠. 근데 주님이 아니야 그렇게 마지막 선언을 하면 안돼 옮겨 돌을 치워봐라고 말씀을 하시죠.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한 이 말씀은 문제 해결의 의지 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는 것은 해결을 위한 행동의 시작입니다.

절망을 향해서 이런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으신지요? 그 해결을 위한 시도를 시작하시는지요?
요한복음 11장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은 처절한 절망에 떨어졌다. 완전히 절망에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세요. 그래 완전히 절망이구나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니가 믿으면 해결할 의지를 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고 도전하고 하자.

그런데 우리가 보통 이런 절망에 대하여서 해결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돌을 옮기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라는 장애물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니까 마리아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 이게 벌써 언제부터 해결 안된 문제인데, 이게 하루 이틀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지금 얼마나 오래된 건데 이거는 해결이 안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돌문을 닫아 버립니다. 이건 끝이야 이건 안 돼 희망이 없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절망은 우리에 의해서 무덤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할려고 하지 않고 절망을 은둔 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늘 신경이 가있고 생각 나고 언제 튀어나올까봐 늘 불안해합니다.

절망은 은둔시킬 것이 아니고 절망은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절망은 우리가 풀어야 될 문제일 뿐이에요. 문제는 답이있다. 문제는 풀려질 수 있어요. 그래서 주님이 이 문제 앞에서 좀 절망을 견제하라고. 철망은 해답을 찾는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절망은 해결을 시도해야 됩니다. 돌을 옮겨 놓아야 됩니다. 돌을 옮기는 그 순간 치료가 시작이 됩니다.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요. 기적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주님이 취한 두번째 방법입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돌을 옮겨라 그런 후에 주님은

세 번째 치료를 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믿음의 탈출 명령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어디를 향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까? 무덤 속 나사로를 향해서 절망의 동굴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묶여 있지 말고 안고있지말고 붙잡혀있지 말고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탈출을 주님이 명령하세요. 그런데 이 탈출은 쉽지 않습니다. 이 탈출은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왜? 이 계산하면 답이 없어요. 아무리 나사로야 나오라 절망으로부터 그 은둔의 동굴로부터 나오라 탈출을 명령해도 이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나흘이 지났어요. 이미 돌문을 막았어요. 계산으로 답이 안 나와요.

그리고 현재 이 사정을 보고 현재 형편을 봐도 불가능합니다. 왜?
요한복음 11장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왠지 아십니까 43 제를 44 들을 다시 보면 수족을 배로 동 인체로 나오는데 여러분
수족이 묶여 있습니다. 얼굴은 수근으로 덮어씌워져 있습니다. 성경은 사실적으로 기록을 해놓은 이유?  
나오니까 풀려졌어요. 뭘 가르칩니까? 믿음으로 탈출하면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거죠. 내 절망적인 이 상황 내 한계의 상황을 믿음으로 탈출하십시오. 묶인것을 풀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죽음 같은 그 절망을 향해서 컴컴한 동굴에 갇혀 있는 듯한 나를 향해서 믿음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선언하고 믿음으로 탈출을 감행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돌을 옮겨놓는 절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이 시간이 동굴 속에 넣어 놓았던 그리고 잊으려고 했던 그리고 잊고 싶었던 그렇게 외면 하려했던 그냥 그렇게 덮어놓고 해결되기를 기다렸데 그 절망을 불러내어 다시 만나서 해결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시편128편
시편 128장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이것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경외가 무엇이며 그 결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귀한 시편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는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그의 길을 걷는 것이다.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삶, 함께 걷기 위해서는 그 방향 목적지가 분명해야 되고 가는 과정 방법과 수단이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인가 그리고 그 가면서 쏟는 에너지 열정이 하나님의 열심과 같은가 이런것들을 우리가 돌아보면서 그 과정은 순종이고 열정과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인데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는가.
교회 열심히 다니고 예배 안 빠지고 교회에서 맡기는일 열심히 하는것, 교인들과 폭넓은 교제를 하는 것,이런 교회 생활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같이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을 봅니다. 그 길이 여호와의 길이 아닌 자기의 길, 자기의 열심, 자기의 목적, 자기의 꿈을 향하여 간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길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사실 허공을 치는 그런 교회 불가하다. 이것을 꼭 기억하면서 이 사실을 한 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3.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하는 자에게 이같은 복을 주실것이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

가정에서부터 나라까지 엄청난 평화의 복을 주십니다.
다음 세대의 염려, 언제까지 이어질것인가? 평안한 삶을 살수있을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중요한 약속이  자식의 자식을 본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 것이다. 그 나라의 무궁한 평화와 자식에 자식을 낳는 그런 세대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복 주여 이것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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