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을 넓혀라
사도행전 16장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경계선
외국인과 결혼한 가정
언어 환경 문화가 다른 경계선을 넘어서서 다양한 가정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경계선 안에 있을때 안정감을 느끼고 또 경계선에서 멀어지면 불안감을 느낍니다.
경계선을 갈등의 자리, 위기의 자리 그렇지만 또 화합의 자리 교류의 자리 만남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날수있는 가능성의 자리입니다. 경계선은 동시에 두려움의 자리 저항의 자리 때로는 공격의 자리 방어의 자리 이런 자리가 될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계선에 서서 본래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외국인의 눈으로 자기를 보기도 하고 자기를 낯설게 보기도 하고 또 타인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가 경계선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경계인이다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 경계인입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땅에 살지 않고 디아스포라도 다른 헬라 지방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외국땅에 사는 사람입니다. 모국어 히브리어를 배웠지만 일상생활에서 집밖으로나가면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런 삶입니다.
유대교를 믿지만 그의 주변에는 온통 우상 종교 이방 종교 사이에서 여호와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경계선이 그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명이 경계선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의 경계선을 넘어서 기독교를 전하고 유대인이라는 인종을 넘어서서 이방인 에게로 또 팔레스타인이라고하는 땅을 넘어서서 온 세계를 향하여서 히브리어라는 언어를 넘어서서 전세계 언어라는 헬라어로 그 경계선을 점점 넓혀가는 사명입니다.
선교가 무엇인가요?
경계선을 넓혀 나가는 거에요. 바울은 복음의 경계선을 넓히는 경계인으로 살았어요. 대부분이 디아스포라 출신이에요. 바울처럼 경계인이라는 뜻이죠. 순교한 스데반 바울 바나바 디모데 누가 한결같이 디아스포라 출신입니다. 유대땅에서 자란 사도 베드로도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서 로마와 아시아를 다니면서 경계인으로서 삶을 살아갔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안정적으로 살아가자 바울과 바나바가 계획을 세웁니다. 1차 전도 여행때 전도한 교회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만나보고 격려하고 양육을 해야 되겠다. 근데 계획을 세우면서 두사람 사이에 분열이 생깁니다. 바나바는 자기 조카 마가 요한을 데려가지 바울은 두사람은 절대 안된다 의견이 갈라졌어요. 1차 전도여행때 마가 요한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예루살렘으로 무단 이탈을 해버렸어요. 그렇게 신뢰없는 사람을 왜 데려가느냐 바울의 주장이었어요. 두사람이 마음이 안 맞았어요 큰 논쟁을 벌인 후에 두사람은 갈라섭니다. 그리고 각자의 선교팀을 따로 만듭니다.
바나바는 자기주장대도 마가 요한과 선교팀을 만들어서 구브로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바울은 새로운 선교 파트너 신라를 동역자도 맞아서 2차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다른 기질과 성격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사역에 원동력으로 삼으시는것입니다.
<만남>
이제 바울이 실라를 데리고 2차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루스드라 지방에 가서 디모데를 만나고 그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탁월한 동역자 뛰어난 동역자 뛰어난 후원자 바나바와 결별을 했습니다. 얼마나 허전했을까요. 그대신 실라를 동역자로 삼았고 이제 새로운 동역자 디모데를 만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디모데는 평생 바울과 아주 동역자로서 평생을 살게 된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될것입니다.
디모데 이름의 뜻 히브리어로 흔하지않은 이름입니다. 뜻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자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에서 결정적인 몫을 감당하게 될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여정에 있어서 때로는 불가피한 대립이 있고 갈등이 생깁니다. 없을수가 없어요. 갈등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 갈등에 얽매여 있을것이 아니고 더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것이 필요합니다. 어려움이 그 갈등이 이제 앞으로 더욱 견고한 신앙을 만들어 내고 나자신과 사역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것입니다.
디모데는 누구인가?
1.출생?
어머니가 유대인 아버지 헬라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한거죠. 이 가정이 만약 유대땅에 있었으면 유대인의 배타성때문에 아주 힘들었을텐데 루스드라라고 하는 외국땅에 살아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2.언제 예수님을 믿었느냐?
제1차 선교여행때 복음을 믿고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그냥 예수님만 믿고 그냥 살아가는겅이 아니고
3.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사람 신앙인
사행16:2
사도행전 16장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형제들 믿음의 공동체 교회에서 칭찬받는
믿음이 잘 성장한 모범적인 성도
로마서14:18
로마서 14장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물론 하나님의 칭찬과 사람의 칭찬이 다를때도 있죠. 하지만 함께 있다는 거죠.
우리가 성경 인물에 대해서 이미지를 다르게 가질때가 있어요.
청년 여호수아죠. 정탐꾼으로 갔을때가 55세 출애굽 끝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할때 이때 모세가 안수하고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고 죽을때 이때 93세
그라고 뭔가 유약한 느낌 그래서 두려워말라 놀라지말라
근데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이도 나이지만 40년동안 출애굽을하면서 전쟁을 치뤘다. 전쟁의 총사령관 여호수아 앞장서서 싸웠어요. 16년간 가나안 전쟁 총 사령관을 합니다. 우리 이미지와 실제 여호수아는 달라요.
다니엘이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82세입니다.
바울의 동역자가 된 디모데 바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 바울을 만났을때 33살입니다.
예수님이 30살에 공생회를 시작했죠. 33살에 십자가를 지셨어요.
바울과 예수님의 나이차이는? 동갑일수도 있고 사도바울이 예수님보다 3~4살까지 적을수도 있어요. 사도바울도 다메섹으로 갈때 나이가 30~33살 그쯤되는 나이에요.
사람들을 디모데가 온실에 식물과 같은 유약한 여호수이와 같은 이미지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는 온실에서 살지 않았어요. 사도바울을 만난이후로 사도바울이 만난 모든 고난의 현장에 항상 같이 있었고 그 고난을 함께 다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고백이 아버지와 아들이 아들이 아버지가 당하는 고난을 디모데가 함께 당했다. 아버지가 고생하는데 아들도 같이 고생하지않았을까.
이런 디모데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만났어요. 운명적 만남이죠.
그런데 이 디모데가 혼합 결혼이잖아요.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출생한 아이들은 반드시 모세의 율법 앞에서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인으로 여겨졌어요. 이방인과의 혼합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인이 되는거에요. 그래서 아직 유대인이 아닌거에요.
그런데 이 유대인들의 생각을 고려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어줍니다.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는거에요. 이게 필요한가요?
디모데의 할례는 여러가지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바울의 구원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 누구든지. 아무런 조건이 필요없고 예수만 믿으면. 아주 확실한 진리입니다.
불과 얼마전에 바울과 바나바는 둘이 예루살렘에 갔어요. 회의를 신청합니다. 전체 회의 이방인들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지 안건 결정을 해주십시오.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으로 들어와서 유대인이 된 상태에서 구원을 받습니까? 이방인들이 할례도 안받고 율법도 안지키고 그냥 이방인인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뭔을 받습니까? 결정을 해주십시오. 그래서 이 회의를 예루살렘 공회다.
우리가 염두해 둘것은 오늘 우리가 믿는 이 진리가 이 당시에 확립이 안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때 공회의 결정이 유대인과 이방인은 달라. 어치피 외국에서 사는데 할례를 받을 필요가 뭐있어. 자기식으로 살다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거야. 이렇게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서 이방인들 외국인들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요. 오늘 우리가 믿는 진리와 똑같애요. 우리도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잖아요. 유대교식 할례는 아무도 안받아도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구원받느냐? 이 얘기가 없어요. 이런 안건은 없어요.
사도바울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물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성령받은 베드로도 오직 예수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줄자가 없다. 그걸 전하는 그렇게 구원받는 거에요.
그러나 아직 이때 미성숙한 사람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 그사람들에게 열심히 율례를 지키고 할례받았는데 다 소용없어. 이러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굳이 그런 얘기를 안하는거에요.
사도바울은 자기를 가리켜서 이방인의 사도라고 자청합니다. 이방인의 사도기 때문에 이방땅에 가서 이방인들 유대인들 모두에게 전한다하여.
그래서 가는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곳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그라그 온 도시의 사람들 모든 유대인들과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디모데를 선교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도시를 갑니다. 유대인 회당으로 가서 가장 먼저 전도를 해야됩니다. 근데 회당에 들어가려면 유대인이라야 되요. 사도바울과 실라는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이에요. 근데 디모데는 들어갈 수 없는. 함께 들어가서 함께 해야되는데.
디모데의 장애물 방해. 반쪽 짜리 선교를.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주었어요. 소문이 납니다. 회당에 들어갈 자격증이 생겼어요.
괜한 논쟁이 생길수가 있어서 이것이 복음 전도의 장애가 될수있다는 거에요.
예수를 믿는 것이 절대적 구원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되는거에요. 이게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아직 퍼지지않았어요.
전도의 장벽을 사도바울은 없애려한거에요.
우리는 사도바울의 태도에서 은혜를 받을수 있습니다.
1.유연한 태도
많이 바뀐 대쪽같은 성격 철저함 완벽주의자 근데 여기서 융통성이 나옵니다.
할례가 필요없는데 굳이 할례를 줬다는것은 복음의 진리를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거죠.
융통성 철저한 충성에서 나온거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전한다는 복음의 목적의 소중함을 알고 방법이나 수단에 대해서는 아주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지혜로워져요.
우리가 분명한 목적을 알면 지혜가 생겨요. 여러가지 방법으로 철저하게 연구를 했기 때문에 여러 경우의 수를 미리 다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반론이 오더라도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이 이기는거에요.융통성이 있는거에요.
2.연약한 자를 위한 배려를 한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시험을 받거든요. 약한사람이 시험에 떨어져요. 완고하고 사고가 짧고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해야됩니까?
상대방의 상황에서 배려를 해야되는거에요.
디모데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판단을 할수있어요. 경계선에 있는 이 디모데는 할례를 받을수있고 안받을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수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고 아직 복음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상황이 혼란스러워서 얘기가 복잡해지는거에요.
사도바울은 융통성 온유함 겸손배려 포용성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남이 오해하지않도록 이것이 설득의 기술이고 이해의 기술인것입니다.
다른사람의 형편을 배려해야 되는거에요.
바울이 이방인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할때도 공회까지 열면서 이 이방인이 할례를 안받아도 되도록 그렇게 결정을 했어요.
이제는 사역에 방해물이 안되게 하기 위해서 오직 복음만이 전파되어야 된다.
고전9:19
고린도전서 9장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20
고린도전서 9장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그들의 형편을 이해한 그 수준에서 복음을 전했다는거에요.
고전9:22
고린도전서 9장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사람을 살리는 목적, 구원하는 목적, 사람을 앋는 목적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는 내 방법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합니다. 이게 중요한 거에요. 성령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것 이것이 온유입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져 준마가 된 순종을 합니다. 이게 온유해요. 성령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고 예민하게 복종하는것 이것이 진짜 온유에요.
이것의 사도바울 인격의 성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결정적인 것은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안지켜도 되는거냐?
그거아니고 사도바울은 융통성을 발휘해서 디모데같이 경계선에 있는 사람에게 할례를 베푼것 4절
공회의 결의를 지키게 하였다.
규칙 진리 목적 결의대로 살아야 되는거에요.
어떤 결과가? 5절
우리가 원칙 결의 질서를 철저하게 지키고 목적이 아니라면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수있고 여러 방법과 수단을 할수있는 거에요. 또 버릴수 있는, 포기할수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복음의 경계선을 날마다 날마다 넓혀가는거에요.
삶의 경계선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경계선에 갇혀 있지마세요. 오늘 새로운 기록을 내세요. 경계선을 깨세요.
원하건데 경제적인 경계선이 날마다 깨지기를 바랍니다. 한번 깨졌다하면 10배씩 깨지기를 바래요.
건강의 경계선이 날마다 깨지기를 바래요.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결심의 경계선들이 더 넓혀지고 깨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인 영향력이 더 크게 날마다 날마다 더 넓혀져야 되는거에요. 경계선 밖으로 밖으로 한발작씩 더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지평선을 더 넓히시길 바랍니다. 해양선도 수평선도 더 깨어서 넓히시길 바랍니다.
콜롬버스가 바다의 수평선을 넘어 항해하고 또 항해하고 항해해서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신대륙 복음의 신대륙 새로운 믿음의 해안선을 자꾸 깨며 나갈때 우리의 믿음의 신대륙이 열리는거에요. 새로운 삶이 열리는거에요.
바울이 끝없이 새땅으로 나갔어요. 아시아지방으로 유럽으로 새로운 지방으로 나갔어요. 경계선을 깼어요.
이스라엘 백성들 요단강을 건너서 새로운 땅으로 들어갔어요. 지리적인 땅의 경계선을 넘었어요.
율법을 지키고 삶의 경계선으로 넘어 갔습니다.
여러분도 삶의 경계선 영적인 경계선을 날마다 넘기를 축언합니다. 악습의 경계선을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선한 경계선을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고정관념의 경계선을 넘어가십시오. 내 주장의 경계선을 넘어거십시오.
성자하나님께서 그 하늘 보좌의 거룩한 경계선을 넘어서 타락하고 죄많고 더러운 이세상에 오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수있었습니다. 신적 거룩함의 경계선까지 깨고 죄악 가운데 오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그 거룩한 나라에 경계선 너머로 올리셨어요.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속의 경계선을 넘어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위대한 경계선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발작씩 나가며 한걸음씩 나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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