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 우리가 알아야할 3가지
요한13:3~7
요한복음 13장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우리 말에 모르는 것이 약이다 알아도 아무런 유익이 없거나 오히려 해가 될 때 우리가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
악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우리에게 약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어떤 약점이나 허물 또 숨겨진 이야기들 그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 모르는 것이 더욱 더 좋습니다. 오히려 알고 나면 관계가 악화되거나 틀어지는 그런 경우들도 많이 있게 됩니다.
모르는 것이 약 일 때도 있지만 또 아는 것이 힘이 될 때도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인 경우도 있지만 아는 것이 힘인 경우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무엇을 알아야 우리의 삶에 힘이 되고 복이 되고 덕이 될까?
반드시 알아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고 살아야하는것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계획된 우리의 삶을 제대로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3장에는 유독 아시고 안다라는 표현이 참 많이 반복되어서 드러납니다. 1절에서도 3절에서도 7 절에서도 11절에서도 12절에서도 17 절에서 18 절에서도 계속 거의 매절마다 아시고 아시니 아심으로 이런 단어들이 등장을 하고 있고 직접적으로 안다라는 단어는 등장되고 있지 않지만 이 아는 표현하는 단어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몰라요.
이 안다라는 표현은 대부분 예수님과 관계하여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셨다.
반대로 제자들은 몰랐다 라고 소개 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나는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알고 이것도 아는데 너희들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한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아는 것을 제자들은 지금 모르고 있었다라는 이야기지요.
알면 좋고 모르면 그만이고 그렇다면 아는 것에 우리가 그렇게 집중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이 앎의 차이가 행복과 불행을 가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17 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3장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알고 행해야 그것이 복된 삶이 될수 있다. 모르면 이 복을 누리지 못한다라고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을 때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예수님의 발 씻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습니까? 어떻게 제자가 선생에게 발을 내밀고 그 발을 씻기움을 당할 수 있습니까?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은 네가 모르지만 네가 훗날 알게 될 거야. 이것을 알고 너희도 알고 행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 된다라고 가르칩니다.
알아야 옳은 일을 행할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하면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무엇을 알아야 우리는 옳은 삶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아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가?
반드시 이것만은 세 가지는 꼭 알아야 된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 첫째가 내 인생에 출발지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뿌리를 아는것 내 근원을 아는 것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요? 여러분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어요.
요한복음 13장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왔다 라는 사실을 아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윈의 진화론 종의 기원은 우리가 상당히 잘못 알고 있는데 한 종에서 한 종으로의 발전은 있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진화가 되고 진화가 되고 진화가 되어 발전이 된다면 여러분 제가 살아온 66년에 인생의 길이 동안에도 전세계 어느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원숭이 한마리쯤은 진화가 되고 발전이 되어서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사람은 여기서 진화가 멈춥니까? 발전이 점점 되어서 무슨 천사가 되든지 또 다른 어떤 개체로 왜 진화는 되지 않습니까? 세상의 이것은 인간의 뿌리에 대해 답을 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보십시오.
창세기 아주 단호하게
창세기 1장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뿌리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남자가 필요에 따라 발전되어서 여자가 되는 법을 성경은 용납하고 있지 않아요. 여자가 필요에 의해 남자가 되는 것을 성경은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조하게 진화를 배격합니다.
창세기 1장 하나님이 각기 그 종류대로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 종안에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환경에 의해서 발전되고 진보될수는 있지만 종에서 종으로 뛰어넘을 수는 없어요. 남자가 여자가 될수는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뿌리, 우리의 출생지, 우리의 출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데 성경은 단호하게 답을 내놓죠.
로마서 11장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우리의 아버지가 돼야 되느냐?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수 밖에 없어요. 내가 아버지께로 부터 왔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거에요. 임사실을 모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참담한 것이 어디 있나.
고린도전서 8장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으십니까?
우리의 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골로새서 1장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 이게 뿌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면 우린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죠. 우리의 뿌리 아버지 되시니까.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신분과 존재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수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온천하 만물이 아버지 것인데 내가 그 아버지로부터 왔다면 우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로마서 8장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니까.
로마서 8장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 이 말은 뭐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삶의 내용도, 삶의 방법도, 삶의 태도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왜 예배 합니까?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근본이기 때문에.
왜 우리가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습니까?
세상의 주인되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인 사실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을예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더불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인생의 종착지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가?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인생이 근본적으로 반드시 알아야 될 질문이요. 또 확신이어야 합니다.
내 생애에 종점 내 인생의 목적지 그 종착지를 모르면 그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지요.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방황할 수밖에 없어요.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내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인가를 아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1절 말씀도 똑같은 말씀이죠.
요한복음 13장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이것이 분명했어요. 내가 가는 곳은 내 인생의 종점은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방황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인생은 직진이었습니다. 가야 할 곳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니까 가다가 가파른 고개 턱을 만나도 올라갔어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모의가 있어도 내가 가는길, 목적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 길을 통과했어요. 오해를 받아도 힘들어도 예수님은 목적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종착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갔어요.
내 인생의 종착지를 알지 못하면 인생은 방황하게 됩니다. 방황할 뿐만 아니라 막 살게 됩니다.
아버지께로 간단한 사실을 알면 우린 막 살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기분 내키는 대로 살 수가 없어요. 아버지께로 가야 되니까.
여기서 끝이라고 하면 우리는 멋대로 살아도 됩니다. 여기서 끝이라고 하면. 근데 여기가 끝이 아니요 가야 할 곳이 있다면 여기서의 삶을 아무렇게나 막 살 수 없는 거죠.
돌아가시고 돌아간다는 표현
여러 번역 - 어떤 것은 그냥 떠난다 단순히 어떤 떠남으로. 그런데 또 어떤 성경에는 아주 목적을 가진 출발로 단순히 어떤 떠나는 어떤 행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지금 출발하는 것으로 묘사를 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여기 사는 것은 아버지의 집을 향한 목적 있는 출발입니다.
목적 있는 출발, 이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 인생이 기대가 됩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는데 그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하면 힘든 오늘의 시간을 살면서도 우리는 좌절하거나 절망하기보다 인내하고 기대하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요.
우리가 돌아갈 우리의 종착지가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과 내가 돌아갈 내 인생의 종점이 어딘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인생의 격이 달라요.
장례식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가 갑니다.
밝은 천국 믿음만 가지고 가겠네 우리는 가요. 우리는 종착지가 어딘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가요. 그 가는 곳이 아버지 집. 좋아서 기쁨으로 신나서 기대하며 우리는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많이 쓰죠. 저승사자가 데리러 온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가기 싫은 곳이다. 가고 싶지 않다는 거죠. 그러니까 저승사자에게 붙잡혀서 끌려간다는 그런 통념적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찬양하며 갑니다. 이것을 아는거와 모르고 살면 이렇게 다른 거죠. 이 사실을 모르면 그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어요.
고린도전서 9장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헛된 인생살이를 나는 살지 않는다는 고백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그러니까 내 종착지를 알면 오늘이 힘들고 오늘이 고통스러워도 기대가 되고 버틸 수 있고 견딜 수 있어요.
셋째로 반드시 알아야할 나머지 한 가지는 뭐냐?
아버지께로 부터 와서 우리가 아버지께로 가는 one way 인생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지? 난 뭘 하면 살아야 되지?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마침도 하나님께 라면 우리에게 당연한 질문이, 그럼 하나님이 왜 보내셨지 나를?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살다가 아버지께 가야지?
이것이 분명해야 하는 거죠. 그것을 바로 우리는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모든 걸 내게 맡겼다 라는 걸 아셨다. 근데 그 다음을 모르면 내가 아버지께 로부터 왔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면
내게 맡긴 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사용하고 다루겠죠.근데 내가 아버지께 로부터 왔고 아버지께로 결국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내게 맡긴 것을 나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라는 답이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것을 아시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13장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를 행하시고
1절에서도
요한복음 13장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될일이 뭔지를 알았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이 뭘 해야 될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자기의 사명을 주님은 확실하게 아셨던 겁니다.
사명을 분명히 아니까 죽음이 코 앞에 온들,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들, 억울한 모함을 쓴 들,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거죠.
우리가 사명을 모르면 내가 무엇을 해야 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면 인생의 시간을 낭비할 뿐이에요.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기 아시고 아시니 안다라고 하는 말은 에이도라고 하는 헬라어를 쓰고 있는데 에이도라고 하는 이 말은 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명을 알면 할일이 보입니다. 같은것을 봐도 알지 못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데 아는 사람은 보입니다.
우리가 출발지와 종착지를 알면 그럼 뭘 해야 될 지를 보게 되요. 그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환경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사람에 따라 휘둘리지 않습니다. 사명을 알면 아무리 척박하고 아무리 곤고한 상황에서도 내가 뭘 해야 될지 답이 보여요. 그래서 기도해야 될일이 보이고 무릎을 꺾어야 될일이 보이고 영적으로 싸워야될 일이 보여지는 거에요.
그러나 알지 못하면 보이는 것이 없어요. 보이는 것이 전부 절망이에요. 보이는게 다 답답한 거에요.
사명이 깨달아지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내 영이 태도가 다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건 좀 몰라도 이 세 가지는 꼭 알아야 됩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우리의 인생이 가치 있는 인생이 되며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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