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변화산
마태 17:1~9
마태복음 17장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우리 주변을 가만히 보면은 등산을 취미로 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더라고요. 건강을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근처에 산을 오르내리는 분들도 있고 먼 거리 높은 산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이들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산을 오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상에 올라섰을때 느끼게 되는 희열때문이라 공통적으로 얘기합니다. 산에 오르면 온통 발아래 있는것 처럼 보이죠. 그렇게 넓어 보이기만 하던 도시가 손바닥만하게 보이기도하고 높이 서있는 빌딩들도 성냥갑 정도로 보일뿐이죠.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고민하던 문제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죠. 마음이 넓어진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다툼 하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넓게 포용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죠. 혼자하던 생각도 정리가 되고 어디선가 소망을 이루기 위한 힘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런 정상의 희열을 아는 사람은 조금 더 높은 산을 찾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기도 역시 산을 오르는 것과 비교할수 있죠. 기도의 산에 오르면 모든 것을 한 눈에 내려다 보는 겁니다. 세상이 보이고 인생이 보이고 참된 모습이 보이고 우주와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보인다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의 산에서 내려다보면 나를 짓누르고 있는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요. 그렇게 손에 쥐기 위해서 안달하던 것들도 사실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웃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미소가 비춰지기도 하고 삶의 의욕을 잃었던 사람이 희망을 보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기도의 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세상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는 천양지차이죠. 기도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전에 몰랐던 묘미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성도는 기도의 맛을 알아야 된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성도라고 할 수도 없겠죠. 성도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물이라고 하는 뜻인데 기도하지 않고는 거룩해 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도하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그랬어요. 어느 산이라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학자들은 이 산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약 한 22 키로 떨어진 홀몬산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산은 사는 대단히 높기 때문에 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뒤덮여 있고요. 남쪽으로는 160km 나 떨어져 있는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아주 높은 산인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높은 산에 올라 가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기도 하시러 산에 올라 가셨다라고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누가복음 9:28
누가복음 9장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 오르거나 휴양을 위해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하시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올라가셨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과 심령 가운데 이런 기도의 산에 올라갈수있는 그런 마음과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의 산에 올라갈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이렇게 기도의 산에 오르면 어떤 역사들이 일어나는지 살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기도해서는 변화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변화되셨어요.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변형이 어디 그 뿐이었겠습니까?
성경은 상징적인 부분만을 묘사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변형은 사람의 입술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그 주변까지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 때 그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겠죠. 그러기에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하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자리가 너무 좋아서 세상으로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라는 얘기죠.
변형되사라는 말은 헬라말로 매트에 모르포대라고 하는 말인데 겉모양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시작되는 본질이 완전히 바뀌는 변화를 얘기하는 겁니다.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성분까지 완전히 변화되는 그런 변화를 얘기하는 겁니다.
기도에서는 모든 것을 변화되게 한다는 말씀이죠. 우리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기도의 산에 오르면 누구도 예외 없이 변화가 시작되죠. 예수를 믿고도 전혀 변화되는 것이 없다면 이사람은 기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 아닐까요. 기도하지 않는ㅁ사람이거나 올바른 기도를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겠죠.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입니다.
우선 삶의 영광의 빛이 기도의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비춰지는 겁니다. 권력으로부터 오는 얼마있다 사라질 영광이 아니죠. 물질의 소유로부터는 욕심과 가득한 영광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내세우고 잘난체 하고 소리치면서 얻는 볼성 사나운 영광도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내 인격이 변화되면서 사람들의 진실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그런 영광이 뒤따르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이죠.
또 기도의 산에 오르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순결의 변화가 나타나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버리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이죠.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기도 앞에서 기를 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가 영광과 순결한 모습으로 변화되면 우리의 주변도 변화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도 그런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기초를 놓고 있는 교회는 누구라도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랑과 희생이 넘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쁨과 평안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아무리 신앙을 가지고 은혜를 받아도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인정하는 그런 모습이기도 하고요. 분명한 것은 기도하면 사람의 근본까지도 변화될 수 있다라고 말씀입니다. 그런 분의 말처럼 은혜받는 것만 즐거워하고 돌아선다면 시간이 지나 다시 제자리를 돌아가서 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뿐이죠. 그러니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끝이 아니죠.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받은 은혜의 힘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완전히 변화되도록 기도의 연단을 다져나가야 된다라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기도의 연단이 뒤따라야 받은 은혜가 나타나서 변화의 열매가 된다는 사실을 꼭 믿고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기도의 산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형되신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고 내려가지말고 거기서 살겠다고 말하자 난데없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 구절에서 마믐에 두어야할 단어는 말할때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말과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무관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에 오르신 이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셨어요. 다만 제자들이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뿐이죠.
예수님은 특별하고도 중요한 대화를 하늘 아버지와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에 관한 내용이었겠죠. 그런데 그런 중요한 순간에 지금 베드로가 엉뚱한 말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십자가의 죽으심을 논하고 있는 자리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산에서 살자는 것이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쫓아다닌 제자로서 할 말이 었겠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엉뚱한 말 꺼내지 말고 들을 말을 들으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습이 베드로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되는 자리에 엉뚱한 요구를 던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신앙의 연륜과 직분에 상관없이 우리는 중요한 십자가는 제쳐놓고 먹고 마시는 것만을 부르짖는 어리석은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이 있으니까.
기도의 산에 올랐다면 모르지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되새기면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의 산에 올라왔는데 실컷 내 주장만 불어넣고 그냥 내려가서는 기도했다고 할 수는 없겠죠. 먼저 듣고 그다음에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도의 산은 하나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기도에는 불가능이 없죠. 우리의 처한 모든 어려움은 우리 기도가 있으면 해결하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점점 타락해가는 세상의 문화도 우리가 기도의 파수꾼이 되어 깨어있으면 정결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관건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의 산을 높이기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내일을 좌우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멀리 내일을 내다볼 수 있고요.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수록 더 넓은 세상을 믿음으로 책임질 수 있게 된다라고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기도의 산을 향해서 올라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산을 오르는 것이 힘든것처럼 기도하기도 쉽지는 않겠죠. 그러나 그곳에서 만날 모세와 엘리야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의 산에서 변화의 축복을 받는 믿음의 시간이 우리의 삶의 자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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