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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바이블/지혜의 말씀

끄트머리 시편 51:10

by diane +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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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트머리

시편 51:10

시편 51장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는 때때로 어리석고 또 우둔해서 크고 작은 어떤 잘못들 또 실수들을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우리의 평소에 우리 일상 속에서 우리의 부족을 보고 또 잘못을 보고 또 연약함을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시편의 다윗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고 고백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날 수 있는데요.
시편 51장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기자인 다윗은 이렇게 새 출발을 소망하고 있죠. 그리고 하나님께 그런 내용으로 간절하게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새 출발이 자신의 삶 속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깨달았던 어떤 사인이 말하자면 있었겠죠. 그런 결단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조금 전에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지만 씨에스 루이스라는 작가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고통의 목적 중의 하나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표현을 한 바가 있습니다. 가슴에서 소리치는 거죠. 비상벨이 울린다고 할까요. 그래서 거기서 계속 그냥 그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내 상황에 대해서 그 상황 파악을 하고 새로운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의 마지막 단어를 잠깐 보시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멈춰서 기도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왜요?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 변화가 크든 작든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그 내면의 변화 새롭게 되는 것 마음의 변화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만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보면 다윗은 사실 무서운 범죄행위 뒤에 하나님께 간절히 고백하고 있거든요.

내가 보는 끝의 기준과 하나님이 보시는 끝의 기준이 틀림에 용기를 얻습니다. 터널 안에서 어둠을 느낄 때 터널의 끝이 다시 새로운 시작이 됨을 알게 하신 감사합니다. 터널 안에서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늘 느끼고 볼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엄마와 남편의 죽음을 연이어 맞이하며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다. 기도도 할 수 없었고 감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 또한 죽음을 맞이할 텐데 언제일지 알 수 없으나 너무 애쓰지 말고 살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 년이 지났습니다. 끝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새 직장을 얻었고 그 직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고 가정의 새 식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몰랐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교만으로 느껴집니다. 회개도 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감사합니다라고 기도 합니다. 나는 끝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끝이 아니셨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아브라함은 어땠나요?
75세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받게 되죠. 이른 나이가 아니었어요. 물론 그 때는 자기 생각대로 이스마엘을 낳게 되면서 실패합니다. 결국 백세에 이삭을 얻게 되면서 믿음의 여정을 다시 출발하게 되죠.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 신분으로 자라죠. 40세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마음을 품었지만 결국 실패 합니다. 이집트 사람을 살인했다는 누명을 입고 도망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 80에 다시 시작합니다. 마흔에 망했다가 여든에 다시 시작합니다.

룩벨 그래암이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빌리 그래암 목사님의 사모님이시죠. 두 분 다 이제 고인이 되셨지만 예전에 그 사모님께서 그 분이 사는 그 마을 주변에 운전을 하다가 한참 동안 도로 공사를 하는 그 지역이 있었나 봅니다. 거기를 매일 거의 지나가는 겁니다. 운전하면서. 근데 거기에 늘  도로 공사 중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고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영어로 end of construction  공사가 끝났다는 이런 도로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그 옆에 또 작은 문구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 동안 이 공사를 하느라 많은 주민들에게 폐를 끼쳤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그런 문구였죠. 그 글귀를 보고 사모님께서 나중에 자녀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다음에 세상을 떠나면 내  묘비에 그 글자 그대로 적어줬으면 좋겠다. end of construction 공사가 이제 끝났습니다 저를 그동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샬롯 노스캐롤라이나에 가면 그 사모님의 묘비에 그 문구가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고쳐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고쳐가면서 다윗처럼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부족과 모자람을 그대로 하나님한테 인정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만날 수도 있구요. 예기치 못한 그런 일들을 만납니다. 오랜 직장을 그만두거나 떠나야 되는 상황도 만나겠고요. 가족과 이별하는 일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때도 물론 있습니다.

우리는 김빠지는 일 많이 만나요. 여러분도 만나실 겁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되는 게 있다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끝이 아니라는 것, 나한테 어쩌면 김 빠지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김빠지는 상황을 만날 때 내가 나도 그런 적이 있어 위로의 한마디 저도 건낼 수 있는 거겠고요. 김빠지고 힘 빠지고 맥 빠지고 그런 순간들이 왜 우리에게 없겠어요. 중요한 건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헬렌 캘러는 물리라는 단어 하나를 배우고 그걸 표현하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7년이나.

베토벤은 청각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혹독한 훈련과 기다림의 연속 끝에 훌륭한 음악을 우리에게 남겨 줬습니다.

넬슨 만델다는 27년간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그 오랜 세월과 과정은 인종의 갈등을 녹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구요.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작가는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었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오늘은 글과 강의로 많은 사람들에게 꿈 도전 또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9살의 소아암으로 짧은 생을 마친 주 별관은 암과 싸우면서 쓴 시를 모아 책을 엮게 되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3, 4학년을 위한 창작동화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백원이는 6년 만에 여섯 번의 인공수정 끝에 얻은 아기였는데 9년 동안 너무나 힘들게 살아갑니다. 6번 화학 치료 30번의 방사선 두 차례 수술 그리고 결국에는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자신의 엄마를 위로한다고 한 말이 있습니다. 엄마 슬퍼하지마 다리 하나가 없어진데도 나는 아무렇지 않아. 내게 아직 한쪽 다리가 남아 있잖아. 이 친구가 세상에 남긴 동화책 제목 아시죠. 내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남아있다.

세계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에 관한 천재 작가죠. 가난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열여섯 살 때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구요. 아버지는 그가 18세 때 살해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정신발작 증세를 일으키게 되구요. 그 이후로 사회주의 결사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고 사용을 언도 받았지만 특별 사면을 극적으로 받아 사형 대신 시베리아로 위배되어서 4년 동안 징역살이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도 고생을 많이 하지만 그의 아내 역시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재혼을 하고 아들을 하나 얻게 되지만 그 아이마저 병들어 죽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간 질병으로 고생을 하기도 하며 빚쟁이에게 쫓기는 처지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불후의 명작을 세상에 여러 편 내놓지 않았나요.

우리도 시련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마다 끄트머리라는 단어를 떠올리셨으면 좋겠고요. 더 나아가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의 고통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수사건에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음의 고통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분은 말이죠. 아니죠 내가 볼 때 최악 같고 내가 볼 때 내 상황이 시궁창 같아도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주시는 새 소망이 예수의 손을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린 절망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이기신 싸움이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부활절이 오면 우린 말하죠. 예수님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정상적인 삶으로 바뀌면 그때도 우리는 승리했다고 말을 합니다. 좌절이나 낙망 낙심과 방황 속에 있다가 그걸 이겨내면 다 이겨내게 되면 그 사람 승리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요. 고독이나 번민 가운데에 있던 사람이 그걸 이겨내고 자유에서 평화를 누려도 승리했다고 표현을 합니다 팬데믹에서 살아남도록 승리했다고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고요. 극복하면 승리했다고 말합니다. 출세하고 성공해도 인간승리라고 우리는 말하죠. 그 외에도 부지기수의 승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이기는 자가 있던가요? 죽음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있던가요? 그게 이긴 겁니다.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셨거든요.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이 죽음을 이기는 힘은 없어요. 권력 있는 사람도 대단하고 세상 권세 다 대단하지만 어떤 권력도 죽음을 이긴 권력은 없습니다. 명예도 지위도 명성도 죽음을 이긴 적은 없거든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 두고 가야지 않나요.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입니다. 그게 우리의 소망일 겁니다. 내 상황이 끝인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세요. 네 몫은 니가 알아서 지키라고 하지도 않으시고요. 혼자 잘 버티라고 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옆에서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씀을 주시고 혼자가 아니라고 이런 교회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고요. 같이 기도할 수 있는 가족을 주시기도 하고요. 나 혼자 견디고 버티고 싸워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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