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
요한복음 13:31~35
요한복음 13장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의 하나는 두려움 입니다.
그 두려움은 아직 겪지 않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그래서 미리 상상하고 또 미리 안될 것을 가상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두려움이 증폭되는 거지요. 이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경우에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혹은 아예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지금의 나는 현재 오늘의 나는 어제 두려움을 극복한 결과이기도 하면서 어제 두려워서 포기한 것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도 새로운 모습일 거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오늘 오늘 오늘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 다른 환경 다른 자리를 우리가 맞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개인의 인생은 이러한 내용들로 어 이어져 왔어요.
그런가 하면 이것은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고 집단도 동일합니다. 우리 교회의 오늘은 어제의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결과입니다. 반대로 우리 교회의 오늘의 이 역사는 어제 그 두려움 때문에 포기한 것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는 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세월이 지나간 이후에 우리가 가지는 생각은 결과에 대한 그 두려움을 잘 극복했다라고 하는 이런 만족도 우리에게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 두려움 때문에 포기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거죠.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결과에 대한 예측하면서 가지는 이 두려움으로부터 우리가 탈출하도록 많은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게 우리 어릴 적부터 들었던 것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어떻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입니까? 이것이 가르치는 의미는 뭡니까? 실태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죠.
이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린 참 많은 것들을 망설입니다. 새로운 어떤 사업을 시도하는 것도 망설이고 우리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도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 주일날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이런 두려움 때문에 망설여서 못 바꾸고요.
이런 것들 중에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의외로 우린 참 많습니다. 혹시 사랑의 눈물의 씨앗이 될까봐 우리는 두려워서 사랑을 시도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랑만큼 지구한 것이 없기 때문에 너희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을 하세요.
요한복음 13장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가 벗어던질수 있도록 탈출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버릴 수 있도록 사랑이 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데
그 첫째는 사랑은 거절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배신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욕을 당할 수도 있어요. 사랑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어떤 흐름에서 주어지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그 행동 끝에 주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운 이 예수님의 행동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발씻음은 제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인 것을 우리가 알수있죠.
특별히 예수님의 이 사랑 가운데 갸롯 유다를 향한 사랑은 아주 지극하고 특별했습니다.
갸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 아닙니까?
요한복음 13장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갸롯 유다는 이미 예수를 팔 생각을 하고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모든 시나리오를 다 구성하고 그리고 그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를 이미 받아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네 번이나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주님은 사랑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요한복음 13장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반복적으로 주님이 말씀을 하세요.
내 마음이 참 괴로운데 오늘 너희 중에 나를 팔자가 여기 있어. 주님이 우회적으로 그의 양심을 두들기는 것이요. 돌아오라고 잘못된 생각을 바꾸라고 나는 너를 그렇게 잃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유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잠시 소란해졌습니다. 누구냐?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내가 떡 한 조각을 건네주는 그 손이 나를 팔아넘길 손이라고 주님이 말씀을 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떡 한 조각을 떼어서 포도즙에 찍어 그에게 끝내줍니다. 그 떡 한 조각을 받아든 그 순간에도 유다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주님이 그를 향해 쏟아붓고 있는 그 사랑의 현장을 벗어나 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랑을 거절해 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의 사랑을 그는 끝까지 배신으로 일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이렇게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떡을 건네주고 세 번이나 반복했던 말씀하셨던 그 예수님이 얼마나 민망스러웠겠어요? 사랑은 이렇게 모욕당할 수 있고 사랑은 이렇게 거절당할 수 있고 사랑은 이렇게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서 조차 배신을 당할 수 있다라고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사랑하라 라고 지금 말씀을 하는 것이죠.
갸롯 유다만 그랬을까요? 가기에 앉아 있던 다른 제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다르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자 베드로가
요한복음 13장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선생을 향한 존경심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선생을 높은 이로 인식했기 때문에 어떻게 선생님에게 내가 내 발을 내밀고 내 발을 씻어 달라고 말합니까라고 말했어요.
그때 주님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요한복음 13장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아주 넉살 좋은 제자였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향해서 허물 없이 주님 곁으로 달려가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립니다.
요한복음 13장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한복음 13장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 순간만은 진실했습니다. 근데 결국 그는 예수를 배신합니다.
마태복음 26장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맹세하며 부인했다는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는 예수를 저주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결코 예수 따위는 알지도 못해. 저렇게 끌려가는 저런 예수 따위는 나와 상관이 없어라고 부인하고 맙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이렇게 거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거절당한 경험이 있을 수 있어요. 여러분이 이런 경험이 없나요? 내가 그만큼 사랑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참 많죠.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에게 사랑의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너희 그래도 사랑은 해야해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거절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린 이 사랑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절 당할 수 있어요.
이것만이 전부라고 하면 사랑은 참 무가치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하나의 사실을 가르칩니다. 사랑 그것은 하늘의 영광을 얻게 한다.
유다가 예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뿌리치고 그가 현장을 뛰쳐나가 지요 주님의 사랑이 쏟아부어지고 있는 그 자리를 뛰쳐 나갑니다.
요한복음 13장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그가 나간 후에 그가 나간 후 라는 말은 주님의 사랑이 거절된 후 유다가 주님을 사랑에 배신을 때린 그 순간 예수께서 이러시대 지금 이 지금 사랑이 거절된 그 순간 사랑이 배신을 당한 그 시간, 인자가
인자는 예수님을 가르칩니다. 내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말씀을 해요.
이 이야기는 갸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겨 그 일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라는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하늘로부터 내게 영광이 주어졌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 이 십자가 사건은 결국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실천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았어요.
사람에게 사랑을 거절 당한 이 순간이지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나로 말미암아 그 영광을 받았도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은 헛된것이 아니다. 사랑의 실천은 하늘로부터 영광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가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은 영광을 붙잡는 것이기에 사랑은 영원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모든 것들은 다 중단되고 모든 것들은 다 끝나고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지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사랑의 영원성이고 이게 사랑의 가치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의해서 사랑이 거절되고 그 사람이 배반 당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 사랑은 하늘로부터 반드시 영광스러운 보상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영원한 사랑을 붙잡고 삽니다. 폐하여 없어질 잠깐 있다 사라질 유한한 것들을 붙잡고 사는 것이 아니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폐하지 않는 사랑을 붙잡고 사랑에 기대어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우리는 사랑을 굉장히 가볍게 치부하잖아요.
고린도전서 13장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의 영혼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림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겁니다.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장성한 후에는 이제는 사랑을 아는 겁니다. 이제는 사랑을 붙잡는 겁니다. 이제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사랑은 반드시 성도가 해야할 사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랑을 주님은 새로운 계명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세요. 어떻게 새 계명이 될 수 있나?
이미 예수님은 사랑을 많이 말씀하셨고 구약에서부터 성경은 사랑을 가르치고 강조해왔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는 이 의미가 도대체 뭔가? 지금까지 없었던 계명이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너희가 인식하고 지금까지 너희가 알고 있었던 그 사랑에 대하여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지금으로부터 사랑하기 새로운 출발을 해라 라고 하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예요.
그래서 새 계명이라고 지금 말씀을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가? 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속에
그 첫째는 사랑이 계명이라는 겁니다.
계명은 어기면 불법입니다. 사랑의 계명이란 말은 싫어도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싫어도.
우린 지금까지 싫은데 어떻게 해? 우린 사랑은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랑은 기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랑은 특별한 어떤 호의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인식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계명이다. 싫어도 행해야 하는 것이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갸롯 유다가거기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 압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그런데 죽겠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려고 대가를 다 받고 와서 지금 넘겨줄 타이밍을 찾고 있는 그 제자를 볼 때 주님은 어떠셨을까요? 주님이 내 심령이 괴롭다고 말했죠. 그 괴롭다는 말은 마음이 지금 흔들린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의 발을 씻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돌아와 하십니다.
사랑이 계명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 제자의 표시라는 겁니다. 제자 됨의 표시, 제자 됨의 그 증명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교회생활에 익숙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신자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아는 것을 뛰어넘어야 된다. 그 앎이 삶이 되어야 진짜 믿는 거야. 그런 이야기입니다.
야고보를 보면 주님이 아주 시니컬하게 우리에게 도전하는 말씀이 있어요.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믿느냐 그랬어요.
여러분 한 번 똑같은 질문을 던져 봅시다.
여러분 하나님이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다음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잘하는도라 귀신들도 믿고
귀신도 하나님은 한 분인 줄 믿는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안다 그랬어요. 그 앎이 무슨 의미를 갖느냐는 거죠.
삶이 없는 앎은 무익하다 삶이 없는 앎은 자기를 착각 속에 머물게 합니다 그 앎으로 자기는 마치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가지고 있어요.
나 아는데 나 아는데 나 아는데 그거 다 아는데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삶이 없는 앎은 죽은 것이다. 삶이 없는 앎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거들먹거리고 그리고 오히려 그 앎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공걱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내야 될 삶이지 우리의 머릿속에 이해하고 있을 삶이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으로 출발되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사랑은 내가 먼저 해야 될 겁니다.
사랑은 기다리는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계명으로 주신것은 서로 사랑하라.
그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상대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도 너부터 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사랑해 오도록 기다리지 말고 너부터 해라는,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사랑의 어떤 조건을 따지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의 어떤 지위를 따지고 환경을 논하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서로 사랑해라 이 말은 네가 기다리지 말고 행해라 순서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순서를 참 많이 정해놔요. 사랑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내가 먼저 하는 겁니다.
사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다. 사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겁니다. 묻고 따지고 조건과 환경을 합을 맞추면 거래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사랑만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랑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사랑을 포기한 갸롯 유다, 그는 사랑을 포기하고 예수의 사랑을 포기 하고 그의 육체의 욕망을 선택했죠. 그래서 그는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넘기고 끝까지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돌이키 려 했죠.
마태복음 27장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사랑을 버리고 그토록 갖고 싶었던 그것을 얻어 자기의 도로 삼았는데 못 가졌어요. 그것도 못 가졌어요. 그렇게 얻으려고 했던 걸 못 가진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그의 생명마저도 잃어야 했습니다.
사랑을 포기하면 우리는 우리의 꿈도 우리의 바램으로 지금의 현재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남겨주신 계명이 사랑이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사랑의 공동체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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