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필요한 사람
창세기 41장
37.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은 꼭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없더라구요. 저 사람은 우리에게 없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사람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꼭 필요한 사람을 한 사람 적고 또 우리 교회나 지역에서 필요하지 않는 사람 한 사람을 쓰자고 하면 누가 될 것 같으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어디에 적 힐 것 같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목회를 하면서 고민되는 한가지 그것은 직분자와 일꾼을 누구로 세울까?라고 하는 고민이죠. 너무 많아서 세울 사람이 많아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많이 있는데 꼭 주님의 일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라 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성경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해몽하는 요셉을 바라보면서 바로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신하에게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이 감동한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을 우리가 어디서 찾겠는가 라는 겁니다. 그와 동시에 바로는 요셉을 전국 총리 대신으로 임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41장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성도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가 이와 같이 하늘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라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했죠. 그러니까 요셉이 어떤 사람인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요셉이 자신의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는 거죠. 그래서 극찬한 동시에 권세를 허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꼭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돼야 된다는 것이죠. 참으로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는 거죠.
오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피하라고만 합니다. 만나지 말아야 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몸을 싸멜 때가 있죠. 저 사람하고 가까이하면 손해 본다 저 사람하고 친하면 망신 당한다라고 하는 생각으로 자꾸 피하는 그런 실정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 주소 아닐까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없으면 더 세상이 잘 돌아간다 이야기를 하죠. 그리스도인들이 없으면 세상이 더 조용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도들이 끼어들면 요 잘 돌아가던 일도 망쳐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더욱더 그런 현실이 우리 가운데 더 가까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마치 요나처럼 말이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요나만 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요나가 타고 배밑창에 들어가 잠을 잡니다. 그 결과 요나가 탄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되죠. 배는 바다 중간에서 요동을 치고 짐을 다 버렸는데도 생명까지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까 풍랑이 잠잠해집니다.
이 말씀을 볼때마다 우리는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과는 180° 정반대이다라고 한겁니다.
사도행전 27 장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을 로마에 이송하기 위해서 백부장 율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선택됐는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여 바울이 "여러분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며칠을 못가서 유라글로라고 하는 태풍을 만나게 되죠. 보통 태풍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큰 태풍이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화물도 버리고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갈 준비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들은 바울이 이제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니라 라고 말이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배만 부서졌고 생명은 보존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바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일보 직전에서 죽음을 건짐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한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하는 그 한사람.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 한사람 그 한사람이 얼마나 귀중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에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 믿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가정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 소중한 귀중한 한사람이 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한 사람을 어찌얻으리요 참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세상은 아무런 사람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대가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일이 너무 적다라는 거죠. 나 혼자의 믿음은 자라고 있는데 그 누구보다도 똑똑하긴 한데 나 홀로의 믿음은 좋지만 막상 세상에 보낼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에 감동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다 옳고 좋은데 따라갈 수 없다라고 하는 거죠.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결단하는 그런 심령을 가진 이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없어서 세상에 내어 놓을 사역자가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불행한 사실인지 모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사람이 없어서 세상을 바꿀 믿음의 사람이 적다는 것이 이 시대의 교회가 안고 있는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까라고 이렇게 여겨집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에 감동이 되어서 세상이 필요로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수 있을까요?
그 대답을 요셉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요셉은 고난의 긴 여정 가운데서도 보디발의 처의 유혹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봤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세기 39장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성도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된 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꼭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성도가 성령충만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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