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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지혜의 말씀

미리 찾아두셨다 따라가면 된다 시편 23:1~6 목

by diane +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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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찾아두셨다 따라가면 된다
시편 23:1~6
시편 23장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만약에 하나님이 눈으로 보이고 하나님 음성이 막 들리고 하나님 만질 수 있으면 우리의 믿음 어떻게 될까요? 더 잘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똑같을까요?

더 잘 믿을 수 있겠죠. 맨날 보이고 들리고 만질 수 있으면.

그런데 하나님 보고 듣고 만지는 게 어려워요. 하나님을 감각으로 경험한다는 건, 오감으로 경험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이해가 잘 안 돼요, 사실.

아니, 하나님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면 잘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도할 필요도 없잖아요. 그냥 하나님 보여주면 되니까. 하나님 보여주시면 되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못 느끼게 하셨을까?
그러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텐데.

시각 장애인은 시각 신경 대신에 뇌에서 촉각, 청각을 많이 쓰게 되니까 그쪽 부분이 더 발달을 하게 되고요. 또 시각 신경의 일부가 청각과 촉각의 정보를 처리하는 데 참여하게 된대요.

그러니까 컴퓨터로 따지면 램이 하나가 더 만들어지는 거예요.
시각의 램이 청각과 어떤 촉각, 이런 다른 감각에 도움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감각이 더 민감해지고 예민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신 이유는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고 알라는 거예요.

그게 뭘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거예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보고, 믿음의 귀로 듣고,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 붙잡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려고만 하지 말고 보이지 않아도 믿는 믿음을 보여 드려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각은 어디에다 쓸까요?
우리에게 주신 모든 건 다 하나님 잘 믿으라고 주신 거거든요.

그러면 오감으로는 하나님 못 느끼면 이걸 어디에다 써야 될까?
순서가 달라야 돼요. 보이고 들리고 느껴서 믿는 게 아니고, 믿고 나서 다르게 보는 거예요. 믿고 나서 다르게 듣고, 믿고 나서 다르게 느끼라는 거예요. 그때 오감을 쓰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라고 눈을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보라고 주신 거예요. 다른 것도 똑같이 하나님처럼 듣고 하나님처럼 하라고 주신 것들이에요.
하나님 경험은 믿음으로만 하고.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보이면 잘 믿을까요?  출근하는데 하나님 같이가 주시고, 지하철 타는데 막 내 옆자리에 있고, 저 배웅해 주시고, 기도 막 할 때마다 하나님이 막 귀에다가 응답 때려 박으시고, 예배드릴 때 막 여기 앞에서 웃고 계시고 막 눈에 보여. 막 이런 게. 그러면 우리가 잘 믿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을 때가 있었어요. 언제냐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때 예수님 눈으로 보입니다. 들립니다. 만질 수 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라서 예수님을 본 게 하나님 본 거고, 예수님 말씀 들은 게 하나님 말씀 들은 거고, 예수님 만진 게 하나님 만진 거예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 믿고 예수님 거부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고.
늘 함께 다닌 제자들은, 계속 하나님 예수님 보고 들었던 제자들은 믿음 계속 흔들리다가 십자가 달리실 때 다 도망쳤어요.

예수님이 단순히 그냥 보이고 들린 것뿐만 아니라 같이 식사도 하시고 병도 고쳐 주시고 귀신 내쫓으시는 것도 보여 주셨어요, 심지어. 그런데도 안 믿어요.

이해가 안 되죠?
나 같으면 예수님 보면 잘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이 특별히 믿음이 좀 모자란 사람들이었나?
우리였다면 어땠을까요? 잘 믿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딱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이 그들의 뜻과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아무리 눈에 보여도요, 하나님이 아무리 음성을 또렷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셔도요,
내 확신과 내 신념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면요, 안 믿을걸요. 거부할걸요. "하나님 못 해요. 하나님 그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틀린 거예요. 저 안 할래요."

이거 하다가 예수님 못 박는 것까지 갔어요. 계속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면 하나님 거부할 거예요.

이렇게 감각으로 믿는다는 건 한계가 있어요. 잘 믿게 되는 게 아닙니다. 감각이 자극되지 않으면 믿음도 끝나요.

그런데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했거든요. 성령님은 안 보여요. 그런데 완전히 믿는 자들로 돌아서버렸어요.

왜냐? 하나님 믿는 방식을 바꿨어요. 감각으로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믿는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믿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보이고 안 보이고, 들리고 안 들리고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돼버렸어요. 우리도 이 믿음을 가져야 돼요.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셨어요.
이 말씀 왜 하신 지 아세요?
하도 보여 준 게 많은데도 안 믿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안 보이는데 믿으면 복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셨어요. 안 보여도 믿는 게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느껴지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제가 예전에 이런 그림을 봤는데,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나라 조선 시대 배경으로 그린 그림을 봤어요. 예수님이 갓 쓰고 한복 입고 계세요. 그 예수님이 재판 당하실 때 포도청에서 사또에게 재판받으시는 장면들, 이런 것들이 있어요.

아마 이 그림의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오신 예수님이다라는 것을 좀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래,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오셨다면 저랬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오늘 말씀에 목자가 나옵니다.
목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목자가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목자가 어떤 일 하는지 그렇게 잘 모릅니다. 그냥 뭐 양 인도하고 풀 먹이고 보호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에서의 목축은 굉장히 익숙한 거여서 누구나 목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일 하는지, 목자는 뭐 하는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됐을 거고, 목자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면 직관적으로 이해했을 거예요.

목자가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직업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목자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목자라고 비유하셨나 보다. 그래서 제가 꼬리로 이런 생각도 붙었어요. 하나님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렇게 역사하신 이유가 목자 때문인가?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꼬리로 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목자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떠올렸던 것들이 뭔지를 알고 이해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시편 23편은 이스라엘 사람들 보라고 쓰여진 거거든요.
처음의 목적은, 원청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뭘 느꼈을까?를 알아야 이 말씀의 진면목을 알 수가 있는 거죠.

오늘 말씀 2절을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쉬어갈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가 양들을 인도할 때 단순히 풀이 많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양들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목자는 미리 어느 땅에 먹을 만한 풀이 있는지 미리 살펴봤을 거고, 그리고 양들이 먹으면 안 되는 독성 있는 풀이 있다면 미리 뽑았을 거고, 그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바위 틈에 독사나 맹수의 굴이 있는지 보고 굴을 막거나 쫓아버렸을 거예요. 독과 맹수와 뱀, 위험하죠. 양들이 만날 그 위험을 목자가 직접 그 위험에 노출되면서까지 그 모든 위험들을 다 제거한 거예요.

양은 풀을 먹을 때 자기가 있는 곳이 위험이 있던 곳인지 아닌지를 몰라요. 목자가 미리 다 없애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양은 아주 약하고 민감해서 경계심과 위험함과 두려움과 불편함과 배고픔이 없을 때만 눕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눕지 않아요. 그런데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누웠대요. 이 모든 게 충족될 만큼 안심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자가 양이 안심하고 누울 수 있을 만큼 모든 걸 다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목자가 찾아낸 그 초원이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로 이동하는 방법이 굉장히 특이한데, 한 우리에 많은 목자의 양들이 같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섞여 있어요. 그리고 우물도 같이 썼어요.

근데 누구의 양인지 식별하는 표시가 없어요. 그러니까 네 양, 내 양 섞여 있는 거예요.

그러면 각자 찾은 초원으로 이제 흩어져야 되는데, 그때 어떤 방법을 쓰냐면 목자가 내는 특유의 음과 소리가 있습니다. 그게 다 목자마다 달라요. 그래서 양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자기의 목자를 따라갑니다. 자기의 목자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다른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먼저 그 길을 다 살펴보신 후예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어떤 길을 만나면 "이게 가도 되나? 맞는 길인가?"라고 두려워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미리 살펴보신 후에 어디에 풀이 있고 어디에 위험이 있고 어디에 쉴 곳이 있는지, 어디에 누울 수 있는지 다 살펴보신 후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된다는 거예요.

근데 인도하심을 따라간다는 게 뭐냐면,
잠언 3장 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방법이래요.

하나님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되는 게, 하나님은 여기로 가라고 저리로 가라고 명확하게 알려 주시는 방법만 쓰지 않으세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면 모든 길이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길이 되는 거예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같이 살아가는 삶이 되면 하나님이 지도하시는 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길이 좋은지 찾는 게 중요해요, 아니면 어떤 길을 가든지 하나님 안 떠나는 게 중요해요? 안 떠나는 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좋은 길인 거예요. "이 길이 맞나, 아닌가?" 이거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 내가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가? 하나님, 내가 신뢰하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살펴보신 길로만 인도하시니까 때로는 양들이 풀을 먹는 도중에 다 안 먹었는데 갑자기 목자가 "가자"라고 할 때가 있어요. 아직 다 안 먹었는데. 왜냐하면 풀을 양들이 다 먹어 버리잖아요, 뿌리채 다 먹어 버리잖아요, 그러면 그 초원에서 풀이 또 안 자라요. 또 자랄 수 있는 풀을 남겨 놓아야 저기 갔다가 여기 다시 오면 또 여기서 또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목자는 그거 다 조절하는 거예요. 그리고 멀리서 이리가 막 나타난 거 같으면 그때 또 "가자" 다른 초원으로 옮깁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 여기 좋았는데 왜 막으세요?" 내가 모르는 위험이 있거나 더 좋은 곳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때로는 목자가 찾은 초원이 멀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양보다 늦게 갈 수도 있어요. 험한 길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따라가야 돼요.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내면의 내 음성을 따라가지 마세요. 비관하고 안 될 거야, 포기하고 좌절하고 자책하는 외침을 따라가지 마세요. 세상의 목소리도 따라가지 마세요. "이게 대세야, 이게 맞는 거야, 이게 좋은 길이야." 그 목소리들은 나를 위해서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책임지고 그 길을 인도하는 자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니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를 따라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예수님의 양이래요. 다른 음성을 따라가지 말고 목자되신 하나님의 말씀만 쫓아서 따라가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와 목자의 인도에 다른 점이 하나가 있어요.

오늘 말씀 3절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어, 나를 위한 건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위한 거였다고? 뭔가 이기적인 거 같은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이름, 거룩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이름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드러내시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얼마나 실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신지를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인도하심으로 드러내시겠다.

그러면 완전하고 흠이 없고 오차 없고 시차가 없을 수밖에 없겠죠. 그 이름을 드러내야 되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그런 거예요. 정확하고 올바르게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가 소생될 수밖에 없겠죠. 내가 다시 회복될 수밖에 없겠죠.

하나님이 스텔스 모드처럼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어요. 안 보여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니까 하나님은 안 보이지만 어디 계시다는 거예요?
나의 앞에 계시다는 거죠. 하나님 안 보이는데 내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어요. 내 앞에 계시구나. 내 앞에서 인도하시는구나.

여러분, 눈 감으면 여기 미간 쪽으로 누가 지나가면 막 다 느껴지잖아요. 그것처럼 안 보여도 하나님 느낄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내 앞에 있구나." 믿음으로 느끼는 거예요, 감각이 아니라.

이사야 45장 2절
내가 너보다 앞서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하나님이 우리에 앞서 가셔서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닫힌 문을 여시고 내가 이길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이기시고 쉴 곳과 피할 곳을 찾으셨어요.

그래서 어려움이 있다면 이미 하나님이 이겨 놓으신 문제예요. 따라가고 인정하는 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관건인 거예요. 그걸 못 해서가 문제죠.

앞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서지 말고 하나님 끝까지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치를 또 아는 방법이 있는데,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만나서 두려울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대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보살피신대요.

함께하시니까 안 보여도 어디 계시다는 거예요? 앞에 계셨던 하나님이 옆에 계시다는 거예요, 내 옆에.

모든 게 순조롭게 되는 거 같아도, 아무 일 없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 일 없는 거 같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지?" 그 상황 속에서 빠져 들어갈 때가 있어요. 그때 하나님 어디 계시냐면 내 옆에 계시대요. 함께 계시대요. 두려움이 옆에 있는 거 같았는데 하나님이 더 옆에 있대요.

옆에서 뭐 하시냐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 보살펴 주신다는 거예요.
두려움이 분명히 있는데, 막대기로는 양을 공격하려고 하는 짐승들을 물리치는 데 쓰고요.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서 잘못된 길로 들어선 양을 이렇게 끌고 올 수 있는 그거거든요. 막대기는 보통 한 1m 정도, 지팡이는 한 2m 정도예요.

무슨 말이냐면 목자가 양의 옆에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얘기예요. 이걸 쓸 수 있으려면 최소한 2m 안에는 있어야 된다는 얘기예요. 진짜 가까이 있다는 거예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있을 때 하나님 어디 계실까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더 가까이에 계십니다. 내 옆에 계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학교 끝나고 밤에 가는데, 한 10시 11시쯤 자율 학습을 해야 돼서 가는데, 작은 동네였거든요. 근데 누가 학교 주변에서 흉기 들고 난동 피운다는 얘기를 들은 거예요. 무섭잖아요. 근데 저랑 같이 가던 친구가 어떤 친구였냐면 키가 195 정도 돼요. 그 힘이 진짜 세요. 덩치도 진짜 좋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름이 병기인데, "병기야, 너만 믿는다. 그 사람 나오면 나를 지켜라." 그 거대한 친구 옆에 걷는데 하나도 안 무서운 거예요. 왜냐하면 걔가 학교에서 제일 잘 싸우는, 고등학교 때 제일 잘 싸우는 애가 있었거든요. 걔를 가만히 쳐다보면 걔가 그냥 가요. 얘가 얼마나 센지를 제가 알아요. 힘이 진짜 센 걸 알아요. 이런 친구가 나를 안위하고 있으니까 무섭지가 않죠.

동물원에서 곰 보면 귀여워요, 무서워요? 귀엽죠.
왜 귀여울까요? 곰과 나 사이에 철 같은 게 있어요, 유리 같은 게 있어요.
근데 곰은 어때요? 원래 곰은 사람을 찢어요. 곰 무서워요. 근데 곰이 왜 안 무서워요? 왜 귀여워요? 내 앞을 막아두고 있는 게 있어요. 곰이 넘어올 수 없게 엄청 강한 강화 유리 같은 게 막고 있어요. 그러니까 곰이 안 무섭고 귀엽지, 사자도 그냥 좋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과 나 사이에는 하나님이 계세요. 그분이 가장 세요. 가장 강합니다. 하나님이 옆에 계셔서 날 보호하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을 믿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어요. 두려움이 날 이기지 못합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약간 위트 있는 장면 같은데,
하나님이 굳이 왜 원수들 앞에서 상을 차려 주셨을까요? 굳이 보란 듯이 왜 원수들 앞에서? 무슨 뜻일까요?

"얘 내 편이야"란 뜻이에요. "너 내 편이야." 나를 공격하려는 이리떼와 같은 상황에서 "나 네 편이야. 우리 같은 팀이야. 너의 적이 내 적이고 너의 문제가 내 문제야."

어느 정도까지 내 편이시냐면 기름을 머리에 붓는다고 하셨어요. 기름을 머리에 붓는다는 건 내가 제일 환대하고 싶은 사람이 내 집에 방문하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줍니다. "당신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걸 당신께 드립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헤매는 것 같고 힘든 일이 오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나를 초라한 존재로 보게 됩니다. 나를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요. "이쯤 되면 이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아직 한참 모자라네." 나는 그대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엄청 빨리 가고 있고 엄청 높아지고 있는 거 같아서 나는 초라해 보여요.

그때 내 옆에서 하나님이 머리에 기름을 붓듯이 "넌 나에게 귀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내가 객관적으로 귀해서 귀하다고 하시는 게 아니에요. 내가 뭔가를 막 잘해서, 사회적으로 내가 막 엄청 가치가 있어서 그거 보시고 귀하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 귀해요. 그냥 귀해요, 그냥 이유 없이. 근데 그게 그 어떤 객관적인 기준보다 더 정확해요. 하나님이 인정하신 귀함이니까.

하나님께 귀한 나는 좋은 거 봐야 되고 좋은 거 들어야 돼요. 하나님께 귀한 나는 안 좋은 거 보면 안 돼요. 나쁜 거 쓰면 안 돼요. 죄와 악과 안 좋은 거에 빠져들면 안 돼요.

좋은 거 봐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 봐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 돼요.
그래서 원수가 아무리 날 괴롭게 해도 날 귀하다고 하시는 내 편이신 하나님이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어 주시는 이 환대가 원수의 괴롭힘보다 훨씬 커서, 훨씬 가까워서 괴롭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두렵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원수가 사라진 게 아니라 원수보다 더 환대해 주셔서 그 옆에 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가까이에 계셔서 하나님만 보이게 하셔서 원수는 있는데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칠 정도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너무 크고 너무 많아서 넘칠 정도다.

두려움이 크면 하나님이 더 커요. 두려움이 가까우면 하나님이 더 가까워요. 상황의 사나움이 크면 하나님의 환대하심이 더 커요. 넘칠 정도예요.

어려움이 많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아요. 넘칠 정도예요. 그래서 내 잔이 넘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속 은혜를 공급하고 계시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건 "하나님, 두려움이 없고 어려움이 없어지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내 옆에 계셔서 계속 은혜를 공급해 주세요. 넘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어요.
하나님이 내 옆에 계속 계시는데 내 옆에 있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하나님, 내가 옆을 안 떠나신다"고 하잖아요. 근데 "하나님, 옆에 계셔 주세요. 날 떠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거 약간 믿음 없어 보이는 거 같지 않아요?

어릴 때 혹시 화장실 갈 때, 아주 아기 때 가족 중에 한 명을 앞에서 있으라고 한 적 있어요, 혹시? 무서워서 그런 적 있어요?
TV에 금쪽이 나오는 TV 프로그램 있었잖아요. 그때 한 아이가 화장실에 동생 세워 놓고 뭐 하는지 아세요?
계속 물어봐요. "너 거기 있어? 아직 안 갔지? 어디 가면 안 돼." 왜 물어봤을까요? 무섭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우리가 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겸손함을 보일 수 있다면, 나의 약함과 나의 낮아짐을 보일 수 있다면,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함께 해 달라는 간절함을 보여 드려도 돼요.

그게 "하나님, 나 무서워요. 하나님 없으면 나 아무것도 못 해요"라는 믿음의 표시라면, 간절하게 하나님 옆에 계신데도 "하나님, 나 떠나면 안 돼요. 하나님 함께 해 주세요" 이 낮아짐의 믿음의 표시라면 얼마든지 해도 돼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를 아는 방법, 하나님의 좌표를 아는 방법?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시다. 옆에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옆에서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옆에 계신 하나님과 늘 옆에 계시는, 함께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옆과 내 앞에 계세요. 근데 거기만 계시지 않습니다. 목자의 위치가 또 있습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무리에서 이탈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 그러냐면 목자의 음성을 놓쳤을 때 그렇고요. 그리고 풀만 먹다 보면 그래요. 내 앞에 있는 풀 먹다 보면 목자가 어디 있는지 보지도 않고 거기에 정신 팔려 가지고 목자 따라가지 않아요.

양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냐면 잃은 양이 되었을 때예요. 목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목자의 보호와 인도의 바깥에 있게 되고 위험과 방황 안에 있게 됩니다.

이때 목자가 뭘 하는지 아세요?
자신이 맡고 있던 그 양의 무리 있잖아요, 그거를 주변의 목자에게 잠깐 맡겨 놓고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데 언제까지 찾냐면 찾을 때까지 찾아요. 풀이 눌린 곳들 바라보고 발자국을 보고 지나온 길을 달려갑니다. 바위 뒤를 살피고 골짜기를 내려가 봅니다.

그렇게 찾잖아요. "왜 없어졌냐고, 왜 벗어났냐고" 책망하지 않고 어떻게 복귀하냐면 그 양을 들고 와요. 지치고 놀랐을 그 양을 지고 와요, 어깨에 매고 오든지.

오늘 말씀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고 방황하는 날 그대로 두지 않고 늘 따라온다는 거예요.
"따르리니"의 원어는 무슨 말이냐면 "추격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 급박하게 추격하듯이 잃은 양을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배드려서 찾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날 찾으셔서 만나 주실 때도 있어요.
제가 페이지처치 글을 올려 올리면 이런 메시지 제일 많이 받습니다. "오늘 글은 저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어요. 이거 고민하고 있었는데 인스타 열자마자 이게 보였어요." 이런 말 진짜 많이 듣거든요. 제가 페이지처치 계정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무심코 피드 올리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이야기들이 보인다면 그 자리가 교회가 될 수 있을 거야. 무심코 열었는데 필요한 말씀이 나왔다는 건 하나님이 추격하셨다는 거예요. 그 글을 통해서 찾으셨다는 거예요.
제가 전도사 때 아주 작은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사역하는데 제가 아동부 전도사, 중고등부 전도사, 청년부 전도사를 맡았어요. 너무 작은 교회라서 전도사 혼자서 그걸 다 했는데, 그 여름에 여름성경학교, 중고등부 수련회, 청년부 수련회를 혼자 다 하고 나서 탈진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탈진했냐면, 몸과 마음이 탈진한 게 아니라 믿음이 탈진해 버렸어요. 갑자기 기도도 하기 싫어지고요, 예배를 드려도 아무 은혜도 안 되고 그냥 몸만 앉아 있고 하나님이 일도 안 느껴져요. 그 기도할 필요도 못 느껴요. 그러니까 믿음이 아예 증발해 버린 거예요. 갑자기 하나님 찾지도 않고 찬양도 안 했습니다. 하나님 아무것도 안 느껴졌어요.
그리고 더 심각한 건 마음이 아무 이유가 없는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우울하고 힘든 거예요. 그렇게 한 세 달 갔어요. 여름 행사 끝나고 세 달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다가 금요 예배 때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하고 내가 왜 이렇게 힘들지?" 그것을 고민했었거든요, 기도 안 하고. 그러다가 왜 그런지를 알게 됐어요.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하지?"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왜 우울했냐면 제가 하나님이 안 느껴지셨다 그랬잖아요. "하나님이 내 안에 안 계시니까 내가 우울해졌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아, 하나님이 나한테 없으면 내가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구나." 그걸 알게 되고 그 기도 시간에 펑펑 울었어요. 그때 다시 하나님으로 충만해졌어요.
저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냐면, 사역이 너무 바쁘니까 하나님 여기다 두고 저 먼저 막 달려간 거예요. 여름성경학교, 중고등부 수련회, 청년부 수련회 막 달려간 거예요. 하나님이랑 안 가고 나 혼자 다 한 거예요. "잘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너무나 크니까 내 앞에 있는 풀만 보고 달려간 거예요. 목자의 음성 못 듣고 목자랑 같이 가야 되는데 혼자 간 거예요. 그래서 잃은 양처럼 두려워하고 우울했던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먼저 가는 저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추격하셨어요. 계속 따라오셨어요. "하나님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들자마자 다시 하나님으로 갑자기 확 충만해졌거든요. 그 생각으로 날 찾으신 거예요, 채워 주시려고.
여러분, 가만히 앉아서 지금 내가 해야 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저 이런 생각들 때 있거든요. 갑자기 막 고민을, "아, 이건 어떡하지? 이건 어떡하지?" 하다가 갑자기 "기도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왜 기도 안 하고 있었지?" 그건 내가 하나님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찾으셨다고 저 믿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났나 보다. 하나님 놓친 채로 혼자 가고 있을 때 내 뒤에 계시다가 "재웅아, 기도해야지"라고 하신 거예요. 가끔 내 일에 몰두하다가,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살다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런 허무함이 들 때가 있거든요. 하나님이 찾으신 거예요. 때로는 한 사람의 말을 통해서, 때로는 어떤 예배를 통해서, 때로는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찾고 계세요.
여러분, 혼자인 것 같을 때, 혼자 감당해야 될 것 같을 때, 하나님 놓친 것 같을 때 하나님 어디 계시냐면 내 뒤에 계세요. 이사야 52장 12절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하나님이 내 앞에서 길을 내시고 뒤에서 호위하십니다. 오늘 시를 쓴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골리앗 앞에 다윗 혼자 선 게 아니에요. 다윗 뒤에는 하나님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윗의 뒤를 따라가서 골리앗을 돌멩이 하나 던졌는데 이기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러 모리아산에 오를 때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아브라함의 뒤를 따라가서 이삭을 대신할 제물로 제사를 드리게 하셨어요.
두려워하는 내 뒤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만난 내 뒤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따라오고 계십니다. 조급해하는 내 뒤에는 이미 준비하시고 기도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있고요. 가진 게 없는 내 뒤에는 이미 다 쌓아두시고 감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있어요. 그러니 내가 늘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심이 날 늘 따라오고 있으니, 늘 거리를 좁히고 계시니 나 내가 늘 여호와의 집에 거할 수밖에 없겠죠.
방황하는 것 같아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건 하나님이 내 앞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도 두렵지 않을 수 있는 건 하나님이 내 옆에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날 지켜 주시고 기름을 부어 주시면서 "넌 나에게 귀한 존재야. 넌 내 편이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것 같아도 멀어지지 않을 수 있는 건 내 뒤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나를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 보일 때 하나님 어디 계실까요? 내 앞과 옆과 뒤를 둘러싸고 계세요. 앞에서 인도하시고 옆에서 지켜 주시고 뒤에서 따라오십니다. 내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있는 곳이에요. 나의 앞과 옆과 뒤를 하나님이 채우고 계시니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오늘 말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모든 필요가 다 채워져서가 아니라 내 앞과 옆과 뒤가 하나님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거 없으면 큰일 날 것 같다" 할 때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으로 부족한가요? "이거 안 되면 안 될 것 같다" 할 때가 있어요. 하나님으로는 안 될까요? 하나님이 안 보여서, 하나님 음성 안 들려서, 하나님 뜻이 손에 안 잡혀서 하나님 아닌 풀이 많은 곳을 찾아가고 하나님 음성 아닌 명확하게 들리는 다른 음성 쫓아갑니다. 그런데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쫓아가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결핍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도록 창조됐어요. 하나님이 아니면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창조됐어요.
하나님은 믿음으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내 앞과 옆과 뒤에 계신 하나님을,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 한 분으로 내 잔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을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완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미리 찾아 주셨어요. 하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앞에 계신 하나님 따라가고, 옆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고, 뒤에서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늘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 보이진 않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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