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속 역사
시리즈 24번째
끝내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느헤미야 6장
15.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16.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7. 그 때에 유다의 귀인들이 여러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저희에게 이르렀으니
18.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 저희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나의 말도 저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항상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에스라 10장 말씀
성전이 세워지고 절기가 있고 또 제사제도 있었고 건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마음을 담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사람이 없다라는 것 그 개탄스러운 상황 앞에서 한 사람 스가냐가 이런 선언과 공헌을 하지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났고 마음이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남아 있다고요.
그런데 그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낙관론 같이 우리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은 가능성들이나 우리가 아직 붙잡지 못한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기회들 이런 것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고 계시는 그 마음이 바로 소망이라고요.
그래서 그 소망은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되신 하나님의 그 소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그 사건 이후로 약 10년의 간격이 있다라고 보시면 틀림 없습니다.이 10년의 간격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에스라 4장
이 백성들이 귀환하여 돌아오고 난 다음에 성전을 건축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 이들이 뼈에 새겨져 있는 그 아득한 두려움과 뼈에 새겨져 있는 그 처절함, 무엇이지 성벽이 없어 외세로 침입을 당하게 된다면 그 포로기의 70년과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라는 그 뼈에 새겨진 처절함, 그 마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동체적인 공감대로 형성되어 있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이 누구라 것 누가 시작이할 것도 없이 다 함께 이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 이 백성들이 함께 모이게 돼요.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영적 회복과 구속 역사 가운데는 항상 대적자들이 생긴다고 그랬어요. 이때에도 이 성벽이 올라갈 때에 이들의 그 모임과 이들의 그 안정감을 시샘하고 또 그것을 원치 않았던 사마리아의 방백인 르훔과 서기관 심세라는 이 두 사람이 이 상황에 대한 내용들을 고발장으로 만들어서 죽은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냅니다.
근데 그 내용 안에는 이들이 성벽이 세워지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죽은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조공도 멈출 자체적으로 독립을 할 것입니다, 수없는 감언이설을 통하여서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이제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귀들이 힘을 합하여서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성벽을 재건해 올리려고 하는 그 찰나에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로 인하여서 공사는 완전히 회파되고 중단되게 되지요.
이 소식이 누구에게 들려지는가?
수산궁에 있었던 한 리더 느헤미야에게 들려지게 됩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어요. 근데 그냥 옆에서 이렇게 술 따라주는 사람이 아니라 왕이 술을 마실 때 와인을 먹을 때에 그 술에 국자를 떠서 손에 한 모금을 두고 먼저 먹어 보는 거예요. 독이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이때 당시에는 독살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왕이 정말 목숨까지도 맡길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술 맡은 관원장으로 옆에 세워요. 그리고 국사를 함께 논하고 그리고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함께 나누는 역할이 바로 이 느헤미야의 역할이었습니다.
근데 느헤미야에게 고국에 들려온 이 뼈아픈 소식은 이 마음을 너무 찢게 만들며 울며 금식하게 만드는 그런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느헤미야 1장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를 여는 이 대목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하는가 하면 140년 전에 BC 586년에 무너졌던 성전과 그때 회파되었던 성벽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느헤미야가 후대 사람이라곤 하지만 140년 전에 허물어졌던 그 성벽과 성전을 향하여 그 소식이 들릴 때에 그것을 가지고 이렇게 비통하게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라는 것은 조금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들은 이 소식은
에스라 4장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예요. 다시 이렇게 세워지기를 원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 기회가 완전히 박탈되어지고 회파되었던 그 소식, 최근에 들려왔던 그 아픔의 소식이 느헤미야 마음 가운데 남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 조서를 내렸던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다시 바꾸셔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 이후에 성벽이 완성되어지고 난 다음 이야기, 그 이야기를 말하고 있어요.
느헤미야 6장
15.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지금 성벽 건축이 어떻게 됐죠? 완공되었습니다. 며칠 만에 완성되었지요? 52일 만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때 지어진 성벽의 모습은 지도를 보시면 겉 모양이 대략적으로 한 3km 정도가 된다라고 보고요. 3km가 되는 이 외벽을 건설하는데 52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라는 것은 이들이 어떻게 힘쓰고 애쓰고 마음을 모았는지를 우리는 충분히 가늠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엘룰월 이것을 유대력으로 본다면 여섯째 달이라는 뜻이고요.
이것을 우리의 달력으로 빗대어 표현한다면 8월과 9월에 걸쳐 있는 달이 엘룰월이에요. 굉장히 더운 건기입니다.
이 날씨에 그 뜨겁게 달궈져 있는 그 돌을 들어다가 그걸 다듬고 깎아내며 성벽을 건설한다는 게 엄청 어려웠다는 거죠. 그 가운데 52일 어떤 면에서 이 백성들에게 52년처럼 느껴졌을지도 몰라요.
이 안에는 성벽이 건축될 때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 많은 대적자들의 도전과 방해 공작이 있었는데요. 그 첫 번째가 바로 말로서 하는 비아냥거림과 또한 조롱이었습니다.
느헤미야 4장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여우가 폴짝 올라갔는데 무너질 정도의 성벽이라
이들이 고작 짓는 성벽은 이런 것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엄청난 조롱과 조소와 비아냥이 이 놀라운 역사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끌어올리기는 너무 어렵지만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누군가를 끌어내리기에는 너무 익숙하다는 거죠. 이 말로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것만큼 속상한 일이 없는데요.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권세 있는 입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입술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사람을 세우는데 역할 하는 입술인 줄로 믿습니다.
근데 우리의 입술은 어디에 더 빨라요?
상처 주고 아파하게 하고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일 가운데 더 빠르다는 거예요.
우리 교회 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때에 우리 공동체 안에 나눔과 모임이 진행될 때에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살리는 말들이 많이 나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이때 당시 조롱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위협은 실제로 칼의 위협이 있었어요. 전쟁의 위협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성벽을 재건하는 사람들은 한 손으로 흙덩이, 돌덩이를 짚고 한 손으로는 칼과 창과 같은 병기를 잡고 있었다라고 그것을 놓지 못하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기근 가운데 건기 가운데 너무 큰 흉년이 들다 보니까 원래 말씀 가운데 같은 동족끼리는 고리대금을 허용하지 않는데 고리대금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먹을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갚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자 동족 안에서 그 자녀들을 대신하여 볼모로 잡히는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가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녹을 받지 않으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느헤미야가 이 성벽 재건을 위해서 정말 애를 많이 썼어요.
그때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니까 이제는 협박이 이루어지고 회유를 가장한, 회담을 가장한, 암살을 시도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고 급기야는 돈으로 거짓 선지자를 매수하여 가지고 이 느헤미야, "지금 네가 너무 위험한 가운데 있으니까 나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서 피하자"라는 제안을 하는데 그 성전에 피하는 그 장소는 제사장들 밖에는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장소였기 때문에 만약 느헤미야가 속아서 성전으로 들어갔다면 율법에 아주 아주 엄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러분 성전이 지어진 것이니 52일이라는 시간이 그냥 뚝딱 완성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완성된 성벽의 역사에 대하여서 성경은
느헤미야 6장
16.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오늘 이 역사를 누가 이뤘다고요? 하나님이 이루셨다라고요.
그 조롱과 모진 위협 가운데에서 이들은 귀를 닫았어요. 이들은 그 칼의 위협 가운데 잘 대비함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고의 땀방울 흘리며 성벽을 지금 재건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일들에 대한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이 대목 가운데 '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는 동의가 되지만 그 수없는 사람들의 땀방울과 그 수없는 사람들의 그 수고로움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생각을 할 때에
느헤미야 3장
이들이 그 조롱의 말에 귀를 닫고 어떤 음성 가운데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가
느헤미야 3장을 보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들이 이 성경 가운데 다 기록되어 있어요.
오늘 우리로 치면 이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우리 하나님이 한 명도 빠지지 않은 채 다 호명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 음성 가운데 귀를 기울이며 그 모진 조롱과 비난을 견뎌내고 이겨냈던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 앞에 정말 채워지는 인생은 우리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죽어라 부르며 끝내 비어진 이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그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우리의 이름이 기꺼이 수고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삶과 인생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충분히 이렇게 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정말 준비했던 이 52일에 그 흘린 땀방울을 우리가 너무 잘 알잖아요. 그래서 만약 이렇게 성경이 쓰여졌다면 "이 모든 상황 가운데에 그 열악한 환경을 뚫고 그 백성이 마음 들여 성벽을 드디어 완성해 내었더라", 혹은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느헤미야는 길을 잃지 않고 그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 성벽을 완공해 내었더라", 이렇게 성경이 적혀 있어도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약 기록되었다면 그냥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주여주여 하는 그런 신앙의 모습, 그것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이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을 때에 고통 가운데에 닥쳤을 때에 그들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이 신앙의 소리를 하나님께 집중하며 오히려 그 상황들이 이들을 더 깊게 하고 더 넓게 하는,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하였다라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도 이런 상황들 만나요. 홀로 고독하게 고립되는 상황들, 어찌 된 정문인지 자꾸 내가 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오해로 다가가는 일들, 무언가를 좀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관계가 틀어지고 나는 참 좋은 의도로 말을 했는데 자꾸만 어그러지는 이런 일들, 이런 상황들이 벌어질 때에는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의미 없어요. 누가 맞고 누가 틀린가 의미 없어요.
그리스도인에 있어서의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말씀으로 재해석되며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초청장이라 생각하고 그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나쁜 상황, 답답한 상황, 어그러진 상황, 부끄러운 상황, 수치스러운 상황들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이예요.
근데 우리 16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느헤미야 6장
16.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어떻게 했다고요? 두려워했다고요.
그리고 크게 낙담했다라고 성경은 표현되어 있는데요.
이 크게 낙담하고 두려워하였다라는 표현을 우리 식대로 다시 표현한다면 '내 확신이 무너져 내렸다', 사실 직역하면 '내 눈에 빠졌다' 이런 뜻이거든요. 근데 이해가 잘 안 되잖아요. '내 눈에 빠졌다', 뭐가 빠졌다는 거예요?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내 목적,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내 계획,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내 기대, 내 자기 확신, 그 위에 자기가 엎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게 산산조각 난 거지요. 그게 완전히 흩어져 버린 거예요.
오늘 그게 이 대적들의 위치였습니다. 말로 얼마나 조소했어요? 얼마나 조롱했어요? 얼마나 칼의 위협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마음으로 기대했어요. '저거 안 될 걸, 저거 엎어질 걸.' 콧방귀를 꼈다는 것이지요.
근데 그 일이 어떻게 됐습니까?
완성이 되었어요. 마음으로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이런 모습이 우리의 속에도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위기 가운데 극복되어지면 어떤 우리 귀한 성도님이 막 잘되면 박수를 쳐 줘야 되는데 막 마음에서 편안하지만은 않은 그런 마음이 솔직히 우리한테 있다는 거예요. 박수를 치고 더 잘될 수 있도록 기도를 해 줘야 되는데 내 처지가 비교가 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의 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안 되는 사람들, 할 수 없는 그 사람들이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는 자기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연약한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공부 잘하는 녀석이 정말 공부 잘해 가지고 서울대 갈 출중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 서울대 가면은요. 그거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근데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표현 하면 좀 그렇지만 다음 생애에라도까지 공부를 해도 대학에 디긋자도 못 볼 녀석이, 요즘에는 대학 들어가는 그 길이요 한 2천 가지가 넘는대요. 더 어려워진 거죠. 하나님 막 은혜 주시고 막 길을 열어 주셔 가지고 얘가 그냥 거기에 딱 붙어. 그럼 이거 누가 한 거예요? 명확하게 누가 한 일이에요? 하나님이 하신 일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상황에 교만할 수 있어요? 내가 했다고 자랑할 수 있어요? 자동적으로 겸손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족함이 있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면 우리가 더 연약할수록, 우리가 더 부족할수록, 우리가 더 같지 않을수록 드러나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참 아름다운 성벽이 재건되었는데 이제 굳건하게 재건되어진 이 성벽 사이로 이상한 것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오늘 17절로 19절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아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아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아까 이 도비아가 누구였지요? "야 여우가 올라가도 성벽이 무너지겠다" 엄청난 독한 말로 조소하던, 성벽 건축을 방해하던 사람이잖아요.
근데 지금 이 귀족들이 도비아와 내통하고 있어요. 근데 이 귀족들은 누구냐? 성벽 건축하는 일 가운데에 함께하지 않은 귀족들이에요.
느헤미야 3장을 보면 이 성벽을 건축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라는 것이예요.
왜 그들이 동참 안 했을까요?
신학적 상상력을 좀 발휘해 보면 너무 당연하게 알 수 있는데요. 고생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십자가 짊어지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냥 편안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이제 성전도 만들어졌겠다, 우리 집은 편벽한 집이라 그랬죠. 고급 인테리어가 지어진 그 집이 있겠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 사회가 안정도 되겠다.
뭐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고생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십자가 지고 싶지 않은 거예요. 고난의 터널 지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냥 이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가정의 목적은, 우리 인생의 목적은, 우리 부부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인 줄로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이 거룩함과 음란이 이렇게 대조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거룩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그런 풍기는 뉘앙스로의 거룩함이 아니에요.
이 거룩함의 이 뜻의 의미는요 분명합니다. 시선이 다른 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다른 곳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그 시선이 분명하게 그 한 곳에 초점이 맞아지는 것, 이것을 뭐라 그러냐면 거룩이라 그러는 것이예요.
왜입니까?
성경에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유비적인 표현이에요? 그리스도와 교회요. 그리스도와 교회를 표현하기 위해 남편과 아내 이야기를 늘 성경은 꺼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고하게 바라보며 한 눈팔지 않는 것, 이게 거룩이라고요. 그러니까 거기서 한눈팔면 그게 바로 음란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에요. 우리 부부의 관계 안에서의 목적은 만족과 행복이 아니에요. 갖추어짐과 채워짐이 아니에요. 거룩이에요.
우리의 인생은 만족과 행복이 아니에요. 거룩이에요.
거룩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통과해야만 합니까?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야 해요. 답답한 일도 당해야 되고 우겨쌈도 당해야 됩니다. 모함도 받아야 되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돼요.
그때마다 우리는 뭐 할 수 있습니까?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있잖아요. 그게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오늘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들이 왜 도비아와 함께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고 있습니까?
그 성벽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두려움은 막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내부에 있는 아주 그냥 교묘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그 시선의 딴 곳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 마음은 여러분 안에서 문이 열리니 막을 길이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도비아는 그 이름의 뜻이 토브야예요. 토브는 창세기에 지으시고 보시기에 어떠했더라? 좋았더라라고 말하는 단어가 토브예요. 선하다, 좋다.
야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이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좋으시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도비아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행동과는 다르게 여러분 성벽의 건축을 방해한 사람이고,
느헤미야 2장 10절을 보면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아'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종은 그냥 우리가 말하는 노예가 아니라 왕의 측근의 신하라는 관직의 호칭일 가능성이 많다라고 학자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도비아와 함께 통혼하며 도비아와 함께 관계를 맺으면 어때요? 지난 시간에 우리가 나누었던 땅을, 상업적인 활로를, 정치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사람이 바로 도비아였어요. 영적으로 우리가 해석한다면 신앙적인 색깔은 전부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 정작 신앙이 없는 껍데기와 같은 사람, 자기의 이름을 내는 사람, 그런데 교묘하게 그것들을 들키지 않는 사람. 이런 모습이 바로 도비아라고 우리는 해석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 도비아가 없습니까?
하나님을 지고하게 바라보며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우리의 이 거룩함을 이루는 일 가운데에 이것저것 신경 쓰고 여기저기에 우리의 시선이 줄줄 새고 있는 도비아와 같은 마음은 우리에게 없나요?
이 작은 경제적인 실리를 챙길 수가 있으니까, 정치적 보험과 같은 안전을 누릴 수가 있으니까, 보장해 줄 수 있으니까.
이 도비아가 암몬 사람이라 그랬는데 유대의 혈통일 가능성이 많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이렇게 지은 것이지요.
만약에 도비아가 완벽한 이방인이었다면 아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와 함께 사돈을 맺고 있는 아라 가문은 1차 귀환할 때 스룹바벨과 함께 나라에 돌아오는 개국공신과 같은 그런 가문이에요. 뼈대 있는 가문입니다. 그리고 도비아의 아들도 무술람이라는 그 가문의 딸과 함께 혼인을 시키는데 이 무술람도요, 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 가운데에 앞장섰던 아주 귀족 중에 귀족인 명망 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왜 그런데 그들이 이 도비아와 함께 이렇게 통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교묘한 방법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에요.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현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깨어 분별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깨어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있는 도비아, 성벽 안쪽에서 내가 관용하며 허용하는 것을 통하여서 편지가 주고받을 수 있는 가능성들과 길을 여전히 열어 놓고 있으면서 내 마음의 시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그런 도비아와 같은 우리 성벽 안에서 열리는 그런 문들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을 빗장 걸어 정리해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누가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붙잡고 계세요. 이 세상의 그 시시한 것들과 우리가 짝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것을 세상적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 매일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말씀,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제 마음속에 한 가지 기도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결단과 선택을 해 나갈 것인데 전부 다 큐티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매일매일 큐티하고 매일매일 주시는 그 말씀을 가지고 매일매일에 나의 삶에 나아갈 수 있는, 전 교인 큐티할 수 있는 교회로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준비하고 우리가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2026년도 하반기 동안 여러분 체질을 바꾸고 마음의 준비를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멘.
이제 그 말씀이 우리에게 부딪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설득용으로 전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우리가 증거하며 나눌 수 있는 영혼 구원 가운데에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우리 공동체가 아름답게 쓰임을 얻게 될 것이예요.
오늘 이 성벽이 완공된 엘룰월 25일이었지요. 근데 이 성벽이 완공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요. 며칠이 못 된 일곱째 달 초하루에 이 백성들이 어디에 모이냐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요. 그리고 어린아이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탁 그 자리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 그 말씀을 증거하고 그 말씀을 증언할 때에 그 말씀이 그들의 삶 가운데 부딪히고 깨닫게 되어 '이제 내가 그 말씀으로 살겠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려 회개하는 모습이 오늘 이 성벽의 재건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죠.
오늘 이 시대 가운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영적 성벽이 바로 설 수 있는 인생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구별 없이 그저 세상 가운데 먹고 마시며 함께 누리는 가운데 행복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거룩을 이루기 위하여서 칠흑같이 어두운 그 새벽길을 걷더라도, 끊어지지 않는 것 같은 그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지라도, 죄의 반복되어지는 습관과 부끄러움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거룩을 이뤄내기 위해 말씀을 붙잡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우리의 영적 성벽이 될 것이기 때문이에요.
느헤미야 선지자보다 앞선 시대 가운데 스가랴 선지자가 이런 말씀을 나누었어요.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세워야 될 이 영적 성벽이 진짜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스가랴 2장 4절과 5절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이 성벽의 정체를 바로 알고 정말 이 세상 가운데 주저함과 머뭇거림 없이 말씀 붙들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불성곽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불성곽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말씀의 영광을 담고 있게 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시시한 것, 다른 것들 우리 인생에 담지 아니하고 말씀 붙잡고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것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벽을 세워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축복합니다.
아멘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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