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장
빌라도가 매우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0.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마태복음 27장
19.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내용을 살펴볼 때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한 자기 아내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된 이 긴급한 말 마저도 예수님이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빌라도에게 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은 빌라도에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저 나사렛 예수가 자칭 왕이라고 하고 있는데 당신이 만일 저 나사렛 예수를 두둔한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일 것이요. 이런 정치적 위협을 받은 빌라도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빌라도 속에 있는 양심과 아내에게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는 바른 것과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큰 소리는 그릇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위협을 느낄 정도로 거세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어느 것을 따르고 선택할까 하는 고민에 쌓입니다. 진정 양심과 정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군중들을 만족시켜 내 지위와 명예를 지킬 것인가 하는 고민입니다. 양심을 따르자니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잃을 것 같고 군중의 큰 소리를 따르자니 양심이 꺼림직한 상황입니다. 정직한 재판과 공평한 법 적용을 해야 하는 의무가 빌라도에게 있었으나 결국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군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정의에 따르는 선택이 아니라 잘못된 것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정두의 압력에 굴복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따르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수가 원한다는 이유로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사실 진리는 많은 사람이 행하고 있다고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진리는 변함없는 진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비극적인 선택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으며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택이 항상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도 진리와 양심과 정의의 작은 소리와 군중의 소리와 같은 큰 소리인 물질과 명예와 지위와 인기 등이 있습니다.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시선을 더 의식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따르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불신앙으로 세상과 더불어 세속화된 삶을 무감각하게 살아갑니다.
이 시대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사람들이 잘못된 것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선은 성공해 보이나 결국은 실패 합니다. 빌라도의 선택은 빌라도 라는 한 사람의 선택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불행한 사람을 대표하고 있는 선택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때에 진리의 양심의 소리를 따르며 바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도와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할 때 진리의 소리를 들으며 확신 가운데 세상을 이기며 자신을 이기며 환경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먼저 군중들의 선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려 주일과 성 금요일의 차이를 보십시오.
종려 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종려 나무 가지를 들고 자신들의 겉옷을 깔면서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던 군중들이 불과 닷새만에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바라바를 놓으소서 라고 아우성 치고 있습니다.
군중들의 변심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여기 군중들의 생각이 5일 만에 변할 만한 이유가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때에 군중들은 예수님에게서 구약시대에 그들이 지내왔던 전통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인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줄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걸었던 것입니다 힘을 가지고 로마를 부수고 그들 편에 서서 민족적 영웅이 될 메시아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온 예수님은 빌라도의 목소리에 한마디도 응수하지 않고 침묵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은 군중들의 눈에 연약하고 무능하고 패배적인 메시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힘에서 민족을 구출하기에는 승산이 없어 보이는 그런 메시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아 달라고 소리치는 바라바는 평범한 강도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7.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이 민란은 로마 통치에 관한 민란이었을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고 그는 자기 민족 편에 서서 로마에 항거한 민란의 주동자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잡혀 왔고 죽음 앞에 서있지만 그는 정치적인 힘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침묵과 무능과 무기력으로 빌라도 법정에 서 있는 예수님보다는 바라바 편이 그들의 기대와 그들의 생각에 훨씬 더 맞는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선택한 것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세속 정치적인 동기가 있었던 그러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그렇게 쉽게 버리는 이유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속적인 동기와 선택이 주가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께 뭔가를 구하고 있지만 진정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기를 원하셨던 구원과 은혜는 등한시 한체 실상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지위와 만족을 소원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가서 병 고치고 사업 성공했다니 자기도 가서 기도해보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바라바를 놓으소서 하는 군중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입니까?
나의 구하는 바는 이 세상의 중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요한복음 19장
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요한복음 19장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10장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빌라도의 선택 때문이 아닙니다. 군중들의 선택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선택입니다. 주께서 이 길을 걸어가시기로 작정하시고 죽기 위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그는 십자가를 대신 지면서 재수 없게 내가 어쩌다 이런 저주스런 죄인들이나 지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나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십자가를 잘 모르고 지고 갔을지라도 훗날 그것이 큰 축복으로 이어진 것을
로마서 16장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는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짊어지는 십자가는 없습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원망하며 무서워하며 거절을 피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힘없이 그저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는 여인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교회 어려움들을 주님의 십자가로 알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며 주 앞에 나오는 자입니까?
지난 과거 수많은 무리들이 오병 이어의 기적의 떡을 먹고 각종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고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심을 구 세로 믿고 그 뒤를 따르면서 기복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어려울 때 십자가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오늘 또 주님은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십자가를 지는 충성된 일꾼을 찾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날마다 날마다 성령에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따른 것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땅히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피한 경우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시고 이제 이후로는 끝까지 십자가지고 따르게 해주시옵소서. 특별히 북녘땅에 있는 믿음의 지체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모진 환란과 고난을 받지만 끝까지 자기 몫에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승리하게 해 주시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키는 북녘의 믿음의 형제들을 생각해서라도 복음 통일의 그날을 앞당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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