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누리는 고난 디모데전서 1:8
성도가 누리는 고난
디전 1:8
디모데전서 1장
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순교 하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디모데였던 것이지요.
행복한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참 가난하고 어려울 때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의 마지막을 디모데에게 의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디모데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어디서 만나는가?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파송을 받아서 1차전도 여행을 다니던 중에 갈라디아 지역의 루스드라를 지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디모데의 고향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을 뻔한 곳이 바로 루스드라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을 만난 디모데가 20년 가까이 바울의 여정에 함께하는 평생 동역자요 제자가 됩니다.
이제 그런 디모데와 세상에서의 이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를 읽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바울의 애잔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유독 고난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평생의 걸어온 길이 바로 고난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30대 중반의에 예수님을 만나고 30년 넘는 세월 동안 약 10,000 킬로가 넘는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거리는 서울에서 출발해서 부산으로 갔다가 여수로 갔다가 목포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 대략 1,000km 정도가 됩니다. 이런 길을 2000년 전에 배를 타고 등짐을 지고 걷어서 열번 넘게 다닌. 오로지 복음 전파 하나만을 가슴에 품고 열방을 다니는 동안 강도를 만나고 배가 파손하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막고 몽둥이로 막고 못 먹고 굶주리고 춥고 헐벗고. 이런 것이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어요. 그러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바울의 인생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 속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감동을 받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어떡합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것이 우리의 기도 입니다.
분단이 우리에게 주는 가슴 아픈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성도의 믿음은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에요. 죽음 가운데서도 부활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거란 이라고 할지라도 부활의 소망을 꺾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에요.
오늘 내 딸을 살려주시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견디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이제 곧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지만 너는 남아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그 길을 예배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디모데에게 남기는 유언 같은 말이 본문이 장 사이에요
디모데전서 2장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내가 일평생 복음을 전하며 고난 받고 죽도록 고생했는데 이제 너도 나처럼 고생하며 살아보라는 거예요.
간혹 북한에서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북한에 살면서 자식들에게 신앙을 전수한다는 것은 자녀들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너도 나처럼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이 삶을, 언제 발각돼서 끌려갈지 모르는 이 땅에서 평생 가슴 졸이고 살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전수하는 것은 그 숨 막히는 고난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복 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성도가 누리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고란은 당하는 것이지 누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읽다 보면 고난은 누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성도의 믿음이 더욱 더 순전해진다는 거예요.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들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전도사가 된 분들이 벌써 200명을 넘었습니다. 신학교에는 70명이 넘는 탈북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40이 조금 안 된 남자 분이 탈북 하고 한국에 와서 예수 믿는 탈북민 자매를 만나 결혼하게 됐습니다. 아내는 신학교를 다니는 탈북 신학생이에요. 아내기도로 2이분도 예수를 믿고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한참이 지나도 애기가 안 생기는 거예요. 인공수정을 해서 다행히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잘 크다가 7개월쯤 됐는데 뱃속의 아이 하나가 갑자기 사상이 됐어요. 다행히 다른 하나는 10개월을 다 채우고 제왕절개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남편은 수술실 밖에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수술하는 중에 갑자기 쇼크가 와서 산모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딸아이는 인큐베이터로 옮겨지고 산모는 거의 모든 피를 쏟아내고 급하게 수혈을 받았어요. 의식불명 입니다. 일주일 후에 의사로부터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장례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소식을 듣고 함께 기도 하던 중에 기적적으로 장기들이 회복되고 심장이 좋아지고 내부종이 빠지게 됐어요. 그렇게 상황이 좋았다 나빴다 반복되다가 결국 27일 만에 이 산모는 딸아이 얼굴 한번 못 보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남편은 북한에서 열세 살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열일곱 살에 어머니가 굶어 죽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그 이후로 숱한 고생을 하고 죽을 거를 넘겨 한국에 왔습니다. 예수 믿는 고향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예수를 믿고 사명을 받고 신학생이 됐어요. 자기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어요.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는 절망입니다.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고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주은이라고 지었어요. 주님의 은혜 장주은? 이게 무슨 주님의은혜 입니까. 또 이분이 기가 막힌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의사 말대로 아내가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했는데 27일 동안이나 살려주셔서 자기 마음을 위로하셨고 밤낮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 했던 덕분에 실족하지 않았다 합니다. 목숨으로 바꾼 귀한 딸 안겨 죽고간 아내에게 감사하다 합니다. 아내 손 잡고 북한 폭음화 위해 목숨 바치자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딸아이 손잡고 그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고난은 그런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동안 기가 막힌 고난과 역경 사망의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홀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성도의 인생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드립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