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바이블/지혜의 말씀

잃어버린 노래 예레미아애가 3:17~25

diane + 2024. 6. 1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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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장
17.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 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잃어버린 노래



노래 책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은 어떤 광야와 애가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러한 작품들이  빚어지게 된 그런 결과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볼 때 그냥 그냥 쉽지 않았다는 것,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나오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애가
그 분이 사랑하고 그 분이 아끼는 누군가가 정말  어려운 기간 그런 시간을 가지고 지나가고 있기에 그것을 지켜보는 그 모습이 너무 너무 힘들고 어 마음이 아프다는 그런 내용의 애가.
우리 모두에게는 사실 그 내용은 다르겠지만 여러분 안에도 그런 슬픔의 노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에 그 노래를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것, 하나님께로 그 노래를 그 슬픈 노래를 그 마음을 가져가는 그 연습을 그 훈련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름부터 슬픕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아라는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던져지다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요. 물론 그가 정말 그렇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어쩌면 예레미야의 삶에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관찰하고 그를 바라볼 때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것처럼 내던짐을 받은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느낀, 우리 안에 그런 슬픈 노래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슬픈 노래를 우리가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슬픈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오늘도 바꿔주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보화가 책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내용을 예레미야와 함께 혹은 예레미야애가와 함께 혹은 다윗의 시편과 함께 읽을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체적으로 백혈병을 앓게 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러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화가입니다. 집안도 가난하고 미술을 그림을 그리려면 굉장히 돈도 많이 들잖아요. 근데 그런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몽우라는 이분의 어떤 별명 그런 이름의 배경 속에서도 꿈 친구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어떤 그림과 그런 재능과 혹은 글을 통해서 자기처럼 좀 버려졌다는 그런 느낌을 받고 정말 어렵고 슬픈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 용기를 심어주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 몽우라고 자신을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이 스물여덟살에 땅에 묻히게 됩니다.
이분의 형이 있는데 얼굴이 너무 비슷하게 생긴 거에요. 형이 빚이 굉장히 많아서 빚 독촉 때문에 사람들이 형을 막 찾아오고 막 잡으러 오는거에요. 근데 하루는 자기를 형으로 착각을 하고 이 사람을 잡아갑니다.  
한번은 내가 땅에 묻힌 날이 있었다 길을 가는데 누가 뒤에서는 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갑자기 봉고차가 와서 날 싣고 두 손 두 발을 묶은 채 얼굴에 천을 얼굴에 씌운채 어디론가 데려가는 거였다. 나는 형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용 없었다. 내가 형이 아닌 이유를 약 2시간에 걸쳐 설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머리를 쳐서 기절시켰다. 눈을 떠보니 내가 머리와 어깨만 빼고 땅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나를 봉고차에 내려 들고 오시다가 허리가 삐끗하셨나보다 계속 허리가 아프다면서 나를 보고 화를 내셨다. 이 xxx 놈  더 이상 못 들겠어 이 XXX 놈 더럽게 게 무거워 가지고 열 받는겨. 결국 내가 형이 아님을 알자 두분은 극도의 우울감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두 분은 나에게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실은 겁만 주려고 그랬다면서 안산까지 태워줄 테니 집에는 걸어가면 안 되겠냐고 물으셨다. 나를 들고 옮기시다가 허리가 잘못 되셔서 안산에 집 앞에까지 데려다 주기는 어렵다고 하셨다. 다행히  안산까지 무사히 와서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 이 바보 화가가 고백하는 내용이,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데 나는 나만의 고통속에서 허우적대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생명이란 귀중한 선물은 어떤 값진 것으로도 살 수 없는 보물이다. 나 때문에 허리가 다치신 복면 쓴 분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바보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예레미야의 삶도 정말 비슷한 것 같아요. 그 죽음의 그 문턱까지 가게 되는 그러한 순간들을 얼마나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삶 속에서 있었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 힘듦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을 찾고 이러한 과정에 대한 내용들이었다면
오늘은 약간 다른 예레미야의 삶 속에서는 그에게도 그런 괴로움이 있었고 아픔과 슬픈 부분들이 있었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들을 초월해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까지도 그 마음까지도 읽어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회복을 위해서 정말 마음 아파하고 기도하는 그러한 예레미야의 모습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바보화가도 마찬가지로 그런 어떤 신체적으로나 여러 가지 아픔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그 통로를 찾으려고 애쓰는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름조차 슬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었던 그런 제사장이자 선지자죠. 눈물의 선지자라는 그 표현은 어쩌면 그의 삶을 압축해놓은 듯한 그런 인상을 우리에게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 속에서 어쩌면 어려웠던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였다는 것
또 하나님께는 레위기 16장의 내용을 우리가 보면은 하나님께서 혼인하지말것을 명하기도 합니다. 황무지 같은 삶을 예레미야는 살게 되고 동족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또 다섯 왕들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하고 전하게 된 다섯 왕들도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리는 그런 상황들 받아주지 않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마저 그세게 등을 돌린 것 같은 그러한 인상을 그가 받았고요. 그 당시에 어떤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 모두가 불안한 그런 때였습니다. 근데 어쨌든 제사장이자 동시에 그 선지자로 있으면서 어려운 것을 한편으로는 제사장의 어떤 직분 혹은 그 정체성을 가지고 죄로 이렇게 무너진 백성들을 변호하는 그런 제사장의 어떤 정체성이 있다면 있었다면 또 한편으로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그런 선지자로서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려고 애를 쓰지만 사람들이 귀를 막고 들지않겠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그 말을 전해야만 되는 그 어려움 그 갈등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이러한 고뇌로부터 흘러나오는 것, 부모님들의 역할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어요.

부모님들도 사실은 사랑하는 아이들 자녀들이 있어요. 너무 너무 아끼는 그런 아이들, 사랑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고 양육하고 그럴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따끔하게 아이들의 어떤 잘못된 길로 가거나 엉뚱한 선택을 하거나 그럴 때는 그 방향을 잡아줘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하다가 너 다칠 수 있어 죽을 수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처럼, 제사장으로서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또 선지자로서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실망에 실망을 그는 거듭 합니다. 모두가 귀를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들면서 항의를 합니다. 어떻게 좀 하나님 저는 한계니까 손을 써 주세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그토록 하나님을 향해 울고 있는 중에 사실상 하나님도 당신의 그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정직한 애가라는 고통스러운 그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보내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죠.

사람이 예레미야 와 예레미야애가를 통해서 느낄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많은 경우에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고 또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들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이 아끼시는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라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2장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예레미야가 지금 놓여 있는 그 어떤 현실 그 주변 그 그 상황을 보면서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의 입은 주께 가까이 있지만 저들의 마음은 전혀 아니라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 현실 앞에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하는 그런 예레미야의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면서 어쩌면 뭐 여러 가지 일로 우리가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순간들이 있겠지만

유산의 전부이 신이 내게 희망이 있다고 하였다 25절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과 외로움과 그 슬픔의 한 가운데서 희망이 보이지않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그의 좌우명 같은 그런 내용이 25절에 기록되어 있죠. 하나님 희망을 두는 연습을 하고. 또 단순히 하나님께 우리가 희망을 두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같은 25절에 이어지는 내용을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분께 도움을 청하는 도움을 구하는 그러한 훈련을 그러한 연습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속에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죠. 더 나아가서 나의 어떤 그 현실과 아픔 속에서도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어쩌면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처럼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그 주변에 사람들의 그 고통과 아픔을 마치 대신해서 눈물을 흘려주고 있는 것처럼 함께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힘들어하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그것을 나의 슬픔으로 알아가게 되는 그런 연습을 교회가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설교는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 단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설교, 이 설교는 여러분도 하실 수 있고 저도 할 수 있고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설교는 이 두 단어라고 합니다. 그 말은 바로 나도 그래라고 합니다. 나도 그래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그 처절한 그 어려움과 그 아픔 한복판에 혼자라고 느껴지는 그 상황 속에서 교회의 핵심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고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교회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처럼 오히려 자신의 슬픔도 있고 괴로움이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지만 오히려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돌아볼 수 있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위로라는 책이 있는데
이 글에 나오는 두안이라는 사람이 어떤 신체적으로 어려움도 있고 장애도 있어서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잠실역에서 노숙자로 대부분의 생활을 하는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을 이요셉이라는 사진작가가 만나게 되고 알게 되고 사귀게 되고 친구가 되어지고 결국 교회로도 이렇게 초대하게 되고 지금 같이 교회를 아직까지 섬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노숙자로서 생활을 하고 있어요. 발음도 어눌하고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요셉 작가를 부를 때마다 요셉을 표현 못하니까 요때비형이라고, 요때비형 같이가 책제목
봄바람 같은 영혼이라는 글의 제목입니다.
볕 좋은 봄날의 어느 오후 낯선 골목 한 모퉁이에서 두환이가 걸어옵니다. 야옹 담벼락에 기대어 길고양이를 불러보지만 고양이는 무척 분주해 보입니다. 반면에 두환이는 너무 심심합니다. 마땅하게 할 일이 없어 그저 떨어진 목련 잎을 가로 세로로 찢으며 나른한 봄볕을 맞고 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풍선 한 쌍을 들고 옵니다. 풍선에 새겨진 글자를 보니 사은품으로 받은 모양입니다. 할머니 풍선 저 주시면 안 돼요? 두환이 특유의 혀 짧은 애교로 할머니를 조르지만 택도 없습니다.  자꾸만 따라오는 두환이를 못 이기는 양 할머니는 과자값이라도 벌 요량으로 두환이와 흥정을 시작합니다. 2000원. 결국 두환이는 득의양양하게 풍선을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도로를 마주하는 짧은 길 하나를 지날 동안 빨간 파란 풍선을 흔들며 걸어가다 갓길 나뭇가지에 풍선을 묶어 버립니다. 두환이가 묶어놓은 풍선 주위로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바람은 자유롭습니다. 무려한 봄날을 자기 멋대로 즐기는 두환이 또한 자유롭습니다. 풍선 같이 한없이 가벼운 영혼,

어쩌면 우리가 오늘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 특별히 어려움으로 인한 어떤 고난과 역경과 슬픔과 한계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우리가 바라볼 수도 있는가 하면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 삶의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 분의 힘을 의지하면서 일어서 걸어라 라는 그 찬양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일어서서 걸을 때 일어서서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 잡아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이고 또 우리의 그런 어려움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그 자리로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도 초대해주시는 분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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