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용서 요나4:6~11
순종과 용서
요나 4장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불순종한 이유
1.니느웨에 대한 두려움
2.40일이 지나면 멸망의 저주를 전한
3.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불안
하나님의 자비가 이방인에게까지 퍼지는게 못마땅한
지금까지 지은 죄를 하루만에 용서 받은 것이 죄에 걸맞지 않다. 하나님의 정의가 공평하지 않다.
요나는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시기 하박국은 남쪽 유다의 멸망시기에 활동했습니다.
하박국 역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바벨론인데 바벨론이 이스라엘 보다 더 나쁘다는 겁니다.
하박국1:13
하박국 1장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이 악인을 벌주지 않아요.
요나와 하박국 선지자가 보기에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요나 4장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의 정의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귀하게 여깁니다.
요나의 정의의 개념은 생명에 대한 사랑보다도 불의한 것에 대해서 심판을 얼마나 했느냐 이게 요나의 정의였습니다.
요나의 분노의 이유가 정당한가?
요나가 왜 니느웨를 두려워하나요? 그들의 죄악 때문에 잔혹함 때문에.
이스라엘이 앗수르 때문에 망했나요?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악마처럼 늑대처럼 사자처럼 잡아먹어버렸나요?
앗수르가 자발적으로 쳐들어왔나요? 아니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려고 하나님이 쳐들어오도록 불러주셨나요?
하나님이 수많은 예언을 해도 듣지 않고 악의 악을 유지하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쳐들어오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불러 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아무리 악한 원수가 있어도 그 원수 때문에 내가 죽는게 아니에요.
내가 무슨 약정이 있길래 원수에게 지는가? 나는 무엇을 고쳐야 되는가? 내 부족은 무엇인가? 이것이 이 사람의 발전이 있고 역경을 헤쳐나갈 힘이 있는 거에요. 역경 중에도 자기를 개발하고 고치고.
그런데 자기 죄는 뉘우치지 않고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을 바라보면서 저 인간 때문에 내 인생이 망쳤어. 저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망쳤어. 저렇게 나쁜 인간이 어딨어. 저 인간만 없으면 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 이게 병입니다.
친구 때문이에요 내가 2등하는게?
털 끝 하나 차이로 내가 2등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털 끝을 극복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진짜 세계적인 수준이 되는 거 아니에요. 노력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진짜 1등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미워할 것은 니느웨가 아니라 자기의 죄악입니다.
이스라엘이 두려워할 것은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죠.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남의 죄를 지적하고 남을 멸망시키고 남을 저주하고 그렇게 한다고 내 문제가 해결 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람은 경계를 넘어간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불의에 대한 처벌보다도 생명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의 경우에는 민족주의의 경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역사상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과 부정의가 일어났어요.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몰랐어요. 자신의 감정과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태도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파벌들이 서로 반목하고 책임을 서로 미루고 서로 죽이고 갈등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 모든 경계 상태를 다 넘어가셨어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온 인류의 죄를 예수님이 책임지시고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고정된 틀 경계선을 다 넘어가셨어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서 아기 예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안식일 법을 넘어서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나병 환자를 직접 손으로 만지시면서 치유해 고쳐주셨어요. 혈류병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어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경계선을 넘어 가셨어요.
그렇게 아무런 죄가 없으신 독생자가 죄인의 길 사망의 경계를 넘어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해주셨어요.
복음은 원래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있었죠.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 민족적인 한계를 넘고 문화적인 길을 다 넘어서 그 물건너 산넘고 그 복음이 경계의 경계를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 복음이 전해진 거에요.
참된 교회의 생명력은 현실에 대한 초월성에 있다.
종교가 현실성에 갇히면 주술이 되는 겁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통해서
현실을 지배하는 현실의 이념 전통 관습 이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봐야 참된 성도요 교회입니다.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가? 경계선 넘어를 공감하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경계를 넘어 타인의 삶으로 보편적인 삶으로 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를 향한 분노가 있는가? 누구를 몰아내고 있는가? 누구에게 복수심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성도는 그 시대의 편견이나 선입관이나 신념이나 이념을 스스로 반성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갱신할 때 참성도가 되는 겁니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무엇보다도 전 세계 모든 사람을 다 다스리고 인류를 다스리고 지구의 황제가 됩니다. 거침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소원을 이루려고 하고 인간적으로 아무리 옳게 보이는 신념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더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신념 정의 헌신 충성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게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마음의 습관들 생각의 습관들 학습된 시대 정신들 자기의 엉터리 신념들 이런 것을 부수고 이런 벽을 부수고 그 경계를 넘어가야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그 경계를 넘어가라고 말해요. 요나처럼 자기가 자기 장벽을 만들고 점점 좁게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장벽을 낮추고 낮추고 재림의 때까지 원수에게까지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가 사는 니느웨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원수가 사는 그 니느웨의 땅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가서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전해야 할 그 니느웨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 두려워하는 원수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이제 그곳에 가서 그리스의 사랑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초대를 받은 여러분 주님과 함께 주님의 그 뜻을 이루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