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세덩이도 없는 자처럼 누가복음 11:5~10
떡 세덩이도 없는 자처럼
누가복음 11:5~10
누가복음 11장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땅에 지진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제일 먼저 개미와 쥐가 자기가 살던 지역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미나 쥐의 이동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지진이 일어날 조짐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개미나 쥐에게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겁니다.
성도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기준은 그럼 뭘까요?
그것은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 영적인 상태가 다르죠.
어느 조사를 보니깐 우리나라 성도들 가운데 100명 중 세명만이 매일 성경을 읽고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사람들 가운데 100명 중 5명만이 조금 전에 들은 설교 본문을 기억해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개의에 얼굴을 묻고 잠시 드리는 취침 기도와 의례적으로 드리는 식사 기도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수는 아주 극소수라 합니다.
많은 성도가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성도가 기도 생활을 멈추게 되면 그때부터 영적인 혼수 상태가 나타난다는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단절이 일어나죠.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살아 있긴 하지만 생기가 없고 무기력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상태 속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바베론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이죠. 예루살렘에서는 안식일이 되면 깨끗한 옷을 입고 재물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서 보냈는데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서는 안식일조차 지킬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예외 드리지 못하니까 영적으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고 방황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 버리고 점점 세상을 따라 살아가기 시작했죠. 타락이 점점 심해졌고요. 영적으로 메말라 갔던 겁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메마른 이스라엘의 상태를 드러내주는 것이 에스겔 37장 마른 뼈의 환상이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가셔서 골짜기에 두셨는데 그 골짜기의 뼈가 가득했다고 했어요. 에스겔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둘러보니까 골짜기에 있는 뼈들이 전부 완전히 말라 있었다는 겁니다.
뼈들이 말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적인 메마름을 상징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완전히 메말라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영적으로 메말랐으니까 성장하지 못하는 겁니다. 부흥하지 못하죠 능력이 없는 것이죠 찬송에도 힘이 없는 놈이다 기도에도 입술만으로 중언부언하는 겁니다. 기도다운 기도가 없으니깐요. 영적인 판단력이 무너져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런 것을 옳다고 하는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해야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기도 해야 성령충만하게 되죠. 기도 해야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기도 하지 않으면 요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올 수밖에 없죠. 기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고 기도 하지 않으면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영적인 사망에 이르고 만다라고 하는 겁니다.
가끔 나는 기도 하지 않는데도 아무 일도 없고 불안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가 있는데 이걸 꼭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하지 않은데도 무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기에 무사한 겁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죠.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 하든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기도 하든 좋은 교우들이나 목회자가 나를 위해서 기도 하든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기도 하기 때문에 내가 영적인 혼수상태 가운데 빠지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죠.
어떤 사람의 집에 한밤중에 귀한 손님이 왔는데 한밤중이라 그 손님에게 마땅히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옆집 친구에게 달려가서 깊이 잠든 친구를 깨워서 떡 세덩이만 빌려달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 권위자는 자기를 깨운 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죠. 아주 위급한 일도 아니고 한밤중에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워서 떡 세 덩이만 빌려 달라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느냐라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간청하면 결국에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빌려줄거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기도에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는 누가 기도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죠.
어느날 한밤중에 어쩔 수 없이 친구의 대문을 두드려야 했던 이 사람에게는 떡 세 덩이가 없었다는 얘기죠. 떡 세 덩이 때문에 이 사람은 친구에게 한밤중에 체면 불구하고 사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가요? 떡 세동이가 없는 사람이죠. 떡 세덩이는 세상 살이에 필요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쉬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 기도하게 되드라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아쉬운 자가 매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만큼 간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쉬움이 더하면 간절함도 더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가난하고 없는 것이 고난인가 혹 이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까. 물질이 없는 가난이든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가난이든 저는 없어 가난한것이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없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없을수록 더 간절하게 그것이 큰 축복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내 기도가 간절하지 못하면 나는 아직 부족함을 모르고 있다는 거 아닐까요? 많이 가졌다고 배부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가져가셨으면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머리털 하나 희어지는 것도 막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바로 우리 아니겠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입은 하나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더라고요. 스스로 교만에 빠져서 강한 척하고 높은 척 하고 있는 척 합니다. 그러니 기도할 수가 없겠죠.
우리 모두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악한 존재라라고 이렇게 고백이 되죠. 이렇게 나에게 떡이 없음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늘 인생의 삶의 자리 가운데서 기도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밤중에 무례하고 염치없이 떡을 빌린 사람은 자신을 위한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삶은 나를 위해서 사는 삶 보다 너를 위해서 도울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될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 기뻐하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둘째로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왜 기도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고 계십니다.
선교사 저드슨 기도는 결단성 있게 지속해나가야 된다. 기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된다. 사적인 일이나 회사 일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가 끊어진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도둑맞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죠.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데이트할 수 있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기도를 통해서 만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죠.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것 아십니까.
또 기도중에 듣게 되는 하나님의 음성은 순간적인 욕심이나 가벼운 소망, 잠시 품어보는 꿈과 같은 것을 버리게 하고요. 마음에 바른 소망을 갖게 하더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런 소원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잘못된 욕심과 온전한 소원을 구별하게 해주실뿐만아니라 잘못된 소원을 걸러내게 하실때가 많이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소원해야 되고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이죠.
그렇게 이기적인 소원은 점점 뒤로 물러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집중하게 하시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왜 해야됩니까?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또 잘못된 소원을 버리고 영적으로 온전한 소망을 가지고 또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 삶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기도가 있어야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전한 소망을 품고 흔들림도 없이 치우침도 없이 오직 한 방향 주님을 위해서 나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꼭 기도의 삶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는 오늘 본문은 기도의 결과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죠.
전화를 거는 사람은 상대편이 받을 것을 믿고 다이얼을 돌립니다. 발신자를 표시해주는 서비스가 생겨서 골라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죠.
믿는 우리에게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시고 찾게하시고 열리게 하겠다는 주님의 응답의 약속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 비유도 그런 말씀입니다.
사람도 귀찮게하면 마지못해 들어주는데 들어주겠다고 이미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말입니다.
캐시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당시 아침마다 마태복음 18장 19~20절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한번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러자 일순간의 침묵이 흘렀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여인이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죠.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니 제 남편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리다 믿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 말이 막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커다란 한교인이 일어나더니 저도 그 말씀을 믿습니다. 부인의 남편을 위해서 기도 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너도나도 성도들이 기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이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인의 남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온 성도가 간절히 합심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 부인의 남편은 배에 선원이었는데 고약한 주정뱅이었다는 겁니다. 집에 있을 때는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성도들이 모여서 이 남편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를 드린 지 얼마 후에 저녁 예배가 있는 날 그 술주정뱅이 남편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겁니다.
수석과 매출이는 요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것을 매우 부적당한때라 말했습니다. 본문에 이 사람은 도저히 불가능한 때로 보이는 그때에도 주저하지 않고 간청을 했다는 말이죠.
간청이라고하는 말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간곡하게 물었을지 모르는 태도로 기도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기도할때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간청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간청해서 평생을 응답 받고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오늘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